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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라는 질문 없이 (합 3:17-18)

중세기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인간이 소를 사랑하는 모습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빗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를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 소를 사랑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려 한다. 우유와 치즈와 당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때문에 당신은 소를 사랑한다. 하나님을 외적인 부유함이나 내적인 위로 때문에 사랑하려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옳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한 욕구를 사랑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풍요롭고 부요할 때나 빈궁하고 궁핍할 때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그 무엇을 받으리라는 보상심리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닌가요.

‘왜’라는 질문 없이 우리가 처해 있는 모든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제적 풍요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멀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질적 곤궁함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하는 걸까요. 우리가 평안하게 잘 지낼 때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난이 닥쳐올 때 과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 낼 수 있을까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10)는 사탄의 생각이 우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바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 ‘왜’라는 질문 없이 나의 형편이 어떠하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 어느 구석엔가는 보상심리가 늘 작용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여러 형태의 일을 도맡을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 공동체의 지체로서 말입니다. 교회 출석이나, 헌금이나, 성가대, 그 외 봉사나 그 어떤 형태라도 모두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어떠한 행위 자체가 정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감사의 표현인지, 아니면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대가를 바라는 것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내어준다면 이것은 교환의 원칙입니다. 인류가 존재한 이후 이 시장의 원칙이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에서 적용되는 원리이지, 기독교의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공로와 업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자연과 이웃을 향한 우리의 모든 행위는 구원을 위한 전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우리의 인간적 지표로 보아 풍요로워 보이지 않을 때에도 끊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기원전 7세기, 제국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성되는 혼란기의 이스라엘에서 신앙인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며 새롭게 마음을 추슬러 떨쳐 일어나도록 도왔던 하박국 예언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 기도가 오늘 각양각색의 도전에 응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메아리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정미현 연세대 삼애교회 목사

천고마비의 계절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