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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영신] 생명이 역사하게 하라(고후 4:7-15)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1165    

생명이 역사하게 하라(고후 4:7-15)

오늘은 2007년의 마지막 주일로 송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다 살고 마지막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은 한 해를 보내는 송년주일입니다. 송년의 비슷한 말이 있는데, 송구(送舊)라고 하여 묵은해를 보낸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한 해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하여 송년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건전한 송년회보다는 망년회라고 하여 한 해의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자고 하여, 부어라 마셔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망년회 한다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람은 새해를 맞이하여도 그럭저럭한 한 해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일 년을 되돌아보면 우리의 일 년은 우리가 살아오고 지나온 일생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고, 쓴 웃음을 지은 적도 있고, 보람이 있었던 날도 있었지만, 한 마디로 한 일도 없는데, 빨리 지나갔다는 느낌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서보면 우리 자신은 하나의 점으로 졸아들고, 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이란 한 없이 커 보이고, 세월이란 무한의 세계로 이어지는데, 우리의 일생이란 길어야 100년 미만으로 영원의 시간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인생은 점을 잘 찍어야 마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문장을 쓰고, 글을 쓸 때에는 반드시 마침표를 찍어야 한 문장이 끝나고 글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이것으로 마침표를 찍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써가야 합니다.

유안진교수의 글 “송년에 즈음하면”이란 시에서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유안진의 시 “송년에 즈음하면”에서 뒤 부분만 읽어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 년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인생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고, 갑자기 철이 들기도 하고, 한꺼번에 일 년치 나이를 먹고 좀 더 많이 늙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철이 들면서 끝나는 것을 봅니다. 철들자마자 인생이 끝나고 맙니다.

우리는 다 바쁘다는 핑계로 인생이란 과연 무엇이냐 하는 진지한 질문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만 인생이 무엇이냐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진솔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인생을 오래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인생을 논하고,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호랑이를 그리지 못한다고 하면 적어도 고양이라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말해야 합니다.

이해인님의 송년의 시들 중에 “송년 기도시-감사의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엔 해가 뜨고/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하루 내내 한 달 내내/ 그리고 일 년 내내/감사하며 살았지만/아직도 감사는 끝나지 않은/ 기도의 시작일 뿐입니다./

/ 받은 은혜 받은 사랑 잊지 않고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베푼 관심 베푼 사랑도/ 돌아보면 이기심 투성이라/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 다시 오는 새해에는/ 더 많이 감사해서 후회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감사의 기쁨을 감사드립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감사는 끝나지 않은 기도의 시작일 뿐이라는 말을 새겨들으시고 감사의 기도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생을 말할 때에 사고 속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험에서 나온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인생이란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라고 하는 말보다 더 진솔하고 실감나는 표현은 인생은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이라고 하는 말이 주는 느낌이 있다면 우선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이란 흙으로 만든 그릇이요, 별로 볼품도 없습니다. 오래 가지 못하고 약하여 조금만 내려놓으면 금이 가고 깨어집니다.

우리 개신교회의 원로이시며 우리 교단 총회장을 지내신 김기수목사님이 지난 24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신 목사님이십니다. 안동교회의 원로목사로, 사랑재단 이사장으로, 북한 결핵 어린이 돕기 범국민운동본부 총재로, 활동하시던 중에 금년 우리나이 75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김목사님은 왕성한 정열과 건강하기로 소문난 분이셨는데, 담석을 수술하던 중에 갑자기 소천하신 것입니다. 작년 2006년 12월에 상원로목사이신 김광현목사님이 돌아가셨고, 금년 12에는 원로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100년 미만 살다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큰 사고로 죽는 사람이 있지만, 아주 작은 사고로도 죽습니다. 육체만 약한 것이 아니라, 정신도 약하고 영적으로 아주 약한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자만 약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약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여성은 더 약한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3:7에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남편된 이들은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럴 것입니다. 여성은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는데 더 강한 사람으로 지음 받았으니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기로는 아내된 여성을 말하면서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했으니, 감히 수사도가 말씀하셨는데, 더 연약하다고 하면 연약한 것입니다. 연약한 그릇은 잘 다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살 다루지 않으면 깨어집니다.

우리 사람이란 의지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육신도 약하고 우리 사람은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사도바울은 인생을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붙인 신학적인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망교회가 한참 잘 되는 교회가 되었는데, 소망교회 수양관에 가보니 공동으로 사용하는 교회 묘지가 있는데,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너는 흙이나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창세기3:19의 말씀인데,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너 사람아.. 잘 났다고 큰소리치지 말라. 잔소리 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다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약하고 값싸고, 볼품없는 질그릇인데,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질그릇만 보면 정말 보잘것없지만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보니 아주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소중한 생명이 있기에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었습니다.

질그릇은 그 안에 담긴 내용에 따라서 질그릇의 이름이 결정됩니다. 보배를 담고 있으니 보배합입니다.

창6:3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 버리니 육신만 남은 것입니다. 육신이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존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육신이 주도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강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엡3:16절에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했습니다. 육신이란 질그릇에 속사람을 담고 있는 데,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으로 인하여 강건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있고, 속사람이 허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속사람이 아예 죽어가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성령님에게 위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풍성한 생명력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7절을 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주시고, 우리를 강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능력이 심히 크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에야 귀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특별히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에 무엇 조금이라도 해놓은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 심히 많으신 우리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8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질그릇이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 보배로우신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겨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겨쌈이란 표현이 아주 실감나는 말입니다. 사방으로 포위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고난을 받는다는 말인데, 어떤 고난을 받아도 억눌리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데 돌파하고 나가야 할지 몰라 답답할 수 있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일을 만나면 난감해집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요, 도태요, 경쟁에서 밀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모든 상황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게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깊은 말씀의 세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박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생명은 우리를 더욱 크게 세워주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마침내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은 무엇에 근거하여 승리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절 말씀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핍박을 받아야 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16:33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마10:28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혹시 무지막지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 육신이 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물질을 빼앗기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욕을 먹으고 명예를 잃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 주님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받은 핍박이었다고 하면 하늘에서 상급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마5:10-12에서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실 말이지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을 때에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예전에는 사람을 죽일 때에 사람을 죽은 시신에 묶어 놓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은 부패균이 산 살을 뚫고 들어와서 마침내 썩어서 죽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이라고 합니다. 11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은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을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와 고린도교회의 관계를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는 사망이 역사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생명이 역사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셨는데, 바로 생명이 역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풍성한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은 여러 분 안에서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에 생명력이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거제 해금강 깎아지른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를 보면서 그 작은 소나무가 수백년 간 자란 나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절벽은 나무가 자랄 토양이 아닙니다. 그래도 생명력이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구원의 능력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 가게 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이 하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역사하시도록 주님에게 나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다시 살리사 하나님 앞에 세워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능히 세워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헌신하는 종들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연말 연시는 새로운 일을 도모하고 계획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했습니다. “존귀한 사람은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이사야32:8)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은 “고명(高明)한 사람은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고명하다는 말은 고매하고 현명한 것을 말합니다. 새번역에서는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라고 했습니다. 고귀한 사람, 고명한 사람, 존귀한 사람은 생각이 고귀하고 존귀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의 위인됨을 결정합니다. 잠23:7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그의 사람 됨됨이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그것은 곧 그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넘치는 생명, 풍성한 생명,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생명 그런 생명이 넘치기만 하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조금도 가감 없이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의 죽을 육체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역사하여야 합니다. 역사하는 생명이 꿈틀거려야 합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이 빛이 들어왔습니까? 생명이요, 빛이신 주님을 모셔 영접하였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안에는 어둠이 물러가고 밝은 대낮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그런 예수의 사람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는 사람(눅 2:2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