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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영신] 희망과 변화만이 살길이다(왕하 25:27-30)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1106    

희망과 변화만이 살길이다(왕하 25:27-30)

일본의 다하라 요네코 여사는 그녀의 나이 18세 때에 삶의 깊은 좌절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결심, 달려오는 전차에 몸을 던졌다. 자신이 원하던 대로 죽었으면 좋으련만 죽는 대신 두 발 및 왼손과 왼팔, 그리고 오른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그녀의 사지 중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른쪽 팔과 오른쪽 손가락 세 개뿐이었다. 처음보다 더 절망적인 환난과 근심의 상황이 찾아 온 것이다. 살고 싶은 의욕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갖가지 방법으로 계속 자살을 시도했지만 남아 있는 세 손가락으로 자살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절망의 밑바닥,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진 다하라 요네코에게는 더 이상의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에 그녀는 선교사 지망생이던 젊은 청년 아키도시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새 생명을 얻게 된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아키도시가 요네코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그 청혼을 받고 그와 결혼, 꿈에서조차 상상 못할 새 가정을 이루었다.

그 이후 요네코 여사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작은 자를 섬김으로 평생토록 주님을 섬기리라 결심을 했다. 그리고 부유하지만 예수를 모르는 자들, 힘은 있지만 진리에 눈먼 자들, 건강하나 참 생명을 지니지 못한 자들을 섬기며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요네코의 헌신과 섬김에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런 자신의 삶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목격하면서 요네코 여사는 주님을 향해 고백했다. “하나님, 제게는 손가락이 세 개나 있습니다.”

한 팔과 두 발, 일곱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잃었기에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환난 속에서, 근심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요네코였다. 그러나 그런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 예수를 만났을 때 그녀의 입에서는 자신에게 무려 세 개의 손가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려 세 개의 손가락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세 손가락으로 죽어가는 영혼, 깊은 환난과 근심 속에 빠진 이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요네코 여사는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수기의 책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산다는 것은 황홀합니다』

건강한 신체가 있을 때는 산다는 것이 무의미했는데, 오히려 다 잃고 황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환난, 근심, 고난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만 삶의 의미를 발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이렇게 삶이 달라질 수 있게 된다.

오늘 오후에 누가 찾아왔다. 라면이라도 좋으니 먹을 것 좀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얼마 드렸다. 동탄에 와서 처음 이런 일을 만났다. 안타깝다. 지금 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희망이 있느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무리 대궐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살기 싫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2008년을 마무리하고 2009년을 시작하는 이 중요한 시점에 두 마디를 화두(話頭)로 붙들었다. 희망(希望)과 변화(變化).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도 ‘희망과 변화만이 살길입니다’라고 정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희망이 있다면 살 수 있다. “한 번 해보자”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성은 열린다. 시멘트에 틈이 있는가? 철근에 틈이 있는가? 나무에 틈이 있는가? 틈이 있다. 못이 들어간다는 말은 틈이 있다는 뜻이다.

마른 막대기에도, 단단한 강철에도,
나름대로의 틈이 있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하물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인 우리들이야...
어찌, 서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완고함을 한 치도 허용하지 않고,
마음의 틈이란 틈은 모두 막아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야 되겠어요

주먹이나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이는 허공처럼,
당신의 마음도 활짝 열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마음을 넓혀, 온 우주를 다 들여다 놓고 살아가는,
멋진 마음의 부자가 되시길 바랄게요.
비좁고 작은 마음의 틈에서

서로 부딪혀 상처 받고 상처 주고 할 따름입니다.
마음이 허공 같으면, 어떤 상처도 아픔도 당하지 않을 거예요.
상처를 입힐래야 입힐 수도 없겠죠...
허공의 사랑으로, 허공의 포용력으로,
나와 다른 존재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틈인 사랑으로 장식할 수 있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저 틈은 희망입니다! -박선희 시인의 <아름다운 편지> 에서-

‘결코, 절대, 반드시’라는 말은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틈이 없다.
언제든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말해야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이게 희망의 말이다.
“그럴 수도 있어!” 이게 암에 안 걸리게 하는 말이다.
희망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말이다. 하나님께는 끝은 없다.

하나님을 붙들면 언제든지, 하나님은 기회를 주신다.
오늘 본문이 바로 희망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유다가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보통 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망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전까지 완전히 부숴드리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보이셨다.

백성들은 둘 중 하나이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살지만 나머지는 죽임을 당했다. 희망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에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을 앞 둔 이스라엘과 왕들에게 선포했다.
“항복하면 산다” 하지만 이 말은 매국노가 할 말이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죽을 고비를 무척 많이 넘겨야 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여호야긴왕은 이스라엘에서 두 번째 마지막 왕이다.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여호야긴은 18세에 왕이 되어 겨우 3달 있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대항하다가 포로로 끌려갔다. 그 뒤를 이은 시드기야는 11년간 왕위에 있다가 바벨론에게 함락당했고 그냥 포로로 끌려간 것이 아니고 두 눈이 뽑히고 그 아들들은 눈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느부갓네살(B.C. 605-562)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한 에월므로닥(EvilMerodach) 왕이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융숭한 대우를 한 기록이다. 여호야긴의 포로 생활을 간략하게 묘사한 것은 바로 유다의 미래에 어떤 소망이 밝아옴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때부터 70년 후에 포로생활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리라고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렘30:3)이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이 포로지에서나마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언젠가는 유다 백성들을 자기 고토(故土)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소망의 증표와 같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Keil & Delitzsch, Wycliffe).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비록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호의로 편히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왕의 신분으로 전국에 잡혀간 볼모의 신세라는 사실이다. 바벨론 왕이 진정으로 여호야긴을 생각했더라면 그를 예루살렘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돌려보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마음속에 사무치는 회한(悔恨)을 품고 고향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렘 22:24-30)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포로생활 70년 중에 절반은 자유를 주셨다. 포로가 아닌 왕족의 대우를 받게 하셨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다. 왜? 고향을 향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그리움을 주시기 위해서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품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의 과정이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훈련을 받는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의 교회가 그냥 세워지지 않고 많은 헌신과 담, 피가 필요하다는 것(미얀마 1819년, 저드슨 선교), 내가 죽고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의 과정임을 깨닫는다.(사람, 환경, 돈, 능력이 아니다)

아프리카 맨 남단에 희망봉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파도가 심해서 배가 많이 침몰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 이름을 희망봉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곳만 통과하면 파도가 잠잠해져 다시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이 세상의 혼란과 어려움의 파도가 강하고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이길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다를 갈라서 세웠다. 우리는 절대로 지금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앙의 엔진을 꺼버리면 안 된다.

여기서 신앙의 엔진을 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나아갈 때 이 세상의 어떤 시험도 이기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희망의 항해」 김서택
신앙의 스위치를 붙들고 놓지 말아라.

인터넷에서 오래 전에 감동적으로 읽은 글이다. 설교 시간에 두 번째 인용 한다.
집에 가려고 지하철 1호선을 탔습니다.
인천 행이어서 자리가 많더군요.
자리에 앉아 있는데
신도림쯤에서 어떤 아저씨가 가방을 들고 탔습니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군요....

아저씨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손잡이를 양손에 쥐고 가방을내려놓고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부터 그 아저씨가 한 말 그대로 씁니다.
"자 여러분 안∼녕하쉽니까"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나선 이유는
가시는 걸음에 좋은 물건 하나 소개 드리고자 이렇게 나섰습니다"
"물건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 프라스틱머리에 솔 달려 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여?"
"칫∼솔입니다"

"이걸 뭐할려고 가지고 나왔을까여?"
"팔려고 나왔쉽니다"
"한 개에 200원씩 다섯 개 묶여 있습니다, 얼마일까여?"
"천∼넌입니다. 뒷면 돌려보겠습니다"
"영어 써 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이게 무슨 뜻일까여?"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나선 이유는 가시는 걸음에 좋은 물건
하나 소개 드리고자 이렇게 나섰습니다"
"물건 보여 드리겠습니다"
"자 프라스틱머리에 솔 달려 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여?"
"칫∼솔입니다"
"이걸 뭐할려고 가지고 나왔을까여?"
"팔려고 나왔쉽니다"
"한 개에 200원씩 다섯 개 묶여 있습니다, 얼마일까여?"
"천∼넌입니다. 뒷면 돌려보겠습니다"
"영어 써 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이게 무슨 뜻일까여?"
"저도 궁금합니다."
"잠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연 칫솔이 몇 개나 팔렸는지 궁금했습니다.
결국 칫솔은 4개가 팔렸구,
아저씨는 또 다시 말을 했는데,
"자 여러분, 칫솔 4개 팔았습니다. 얼마 벌었을까요?"
"팔아 4천원 벌어쉽니다"
"제가 실망했을까여? 안했을까여?"
"예. 쉴∼망했쉽니다"
"그렇다구 제가 여기서 포기하겠쉽니까?"
"다음 칸 갑니다!"
하면서 아저씨는 가방을 들고 유유히 다음칸으로 가더군요......
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뒤집어졌습니다.

희망, 그 희망을 우리는 잃지 않아야겠다. 다음 칸이 있으니까.................
오늘이 12월 31일이라고 절망하는 바보는 한 사람도 없다.
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은 알지만 또 아는 게 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오늘은 지나갔지만, 내일부터는 다르게 살면 된다.
하지만 기억하라. 내일은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결단하지 않는 한 반복된다. 그러므로 너무 큰 목표를 잡지 마라.
한 두 가지만 다르게 살기로 결심하라.
신앙적인 면에서 두가지 변화를 요구한다.

1)“내 생애 마지막 한 달” 특새를 하기로 결심하라.
매일 새벽을 깨우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1주일에 한 번씩으로 양보했다.
처음에는 30번을 계획했다가 너무 벅찰 것 같아 10번으로 조정했다.
그동안 살았던 인생은 되돌릴 수 없다. 좋든, 싫든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후의 인생이다.

내 인생이 30일의 시한부 인생이라 가정하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우리 동탄성지가족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실히 믿는다.
충분히 기대해도 좋다. 기대한 만큼 은혜도 클 것이다.

2)소그룹모임을 1월부터 시작한다. 구역, 목장, 가정교회, 셀... 이름은 다양하다.
예배시간에는 나눌 수 없는 대그룹이어서 교제에 한계가 있다.
소그룹으로 모여 함께 할 때 신앙생활의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우리 교회가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가족같은 공동체를 꿈꾼다.

산다는 것은 황홀하다?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희망을 갖자. “잘 될 거야. 길이 있어! 난 할 수 있어! 내게 끝은 없어!”
그러기 위해 변해야 한다. 누가? 내가. 내가 변하면, 아무 것도 안 변해도 달라진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며느리가 있었다. 신앙이 없는 가정에 시집을 와서, 혼자만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시댁식구들은 하나같이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아가야, 이 번 일요일에는 교회 가지 마라. 바쁜 일이 있다. 고추밭에 가서 고추대를 다 뽑아야 한다.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니까, 이 번 일요일에는 교회 가지 마라." 라고 하시는 거다. 며느리는 고민을 했다.

그러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며느리는 토요일 밤에 가족들은 다 잠을 자는데, 혼자 조용히 일어나서 고추밭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 넓은 고추밭의 고추를 밤새도록 다 뽑아서 묶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주일이 되어, "아버님, 저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시아버지가 역정을 내며 말했다. "아가야, 오늘 고추밭에 고추대 뽑아야 하니까, 교회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님, 고추대 다 뽑아놨습니다. ”

"언제 다 뽑았다는 거냐?" "어제 밤새도록 다 뽑아놓았습니다."
시아버지가 깜짝 놀라 가보니, 고추대가 다 뽑혀 묶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 사건에 감동을 받은 가족들이, 그 후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핍박한다며, 그래도 난 교회가야 한다.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시아버지가 무서워 교회가는 것을 쉰다.
우리는 이 며느리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불평, 원망하지 말고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변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변하면 된다.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이 변한다.
이런 사람이 희망의 사람이다. 2009년은 어느 해보다 어렵고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희망과 변화가 살길이다.” 이 말을 되새기며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여호야긴왕을 37년만에 높이신 것처럼, 때가 되면 높이신다.
고생한 만큼 하나님은 나를 크게 쓰실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눅 2:2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