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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강절] 별을 낳는 사람(마 2:1-10)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3357    

별을 낳는 사람(마 2:1-10)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셨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 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그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가운데서 아주 작지가 않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그 때에 헤롯은 그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 왜 하필 12월 25일인가?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네 번째 주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빕니다. 서방교회는 오랫동안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하지만 주님이 실제로 태어나신 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성경도 그 날을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12월 25일 혹은 1월 6일은 역사적인 날짜라기보다는 신학적인 고백이 내포된 날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 연말에 성탄절을 맞이한다는 게 여러 면에서 뜻이 깊습니다. 살아온 한 해를 돌아보며 다가오는 한 해를 구상해야 하는 시간을 들뜬 상태에서 보내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를 성찰하며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4주간의 대림절 기간은 자숙과 성찰의 시간인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빛을 영접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탄절이 태양신을 기리는 로마인들의 축일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인들은 가을걷이가 마감되는 12월 중순 이후 수확을 기뻐하는 동시에 농업을 관장하는 신에게 감사하는 새터네일려 축제(Saturnalia festival)를 즐겼습니다. 북유럽과 서유럽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런 축제를 벌였습니다. 주후 274년 경 로마 황제 아우렐리안(Aurelian)은 이런 축제들을 ‘무적의 태양’을 기리는 축제 Sol Invictus(the Unconquered Sun)로 통폐합했습니다.

민중들의 의례를 제국의 질서 속에 통합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동지 무렵인 이때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때였고,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모두가 축제 기분에 들뜨는 이때를 성탄절로 선포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빛의 축제를 즐기는 그 때,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날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이 처형당한 것이 유월절 전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처형당하신 해의 유월절을 로마 달력으로 계산하면 3월 25일이 됩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잉태되신 날 세상에 구원이 도래하여 처형당하신 날 완성되었다고 믿고 싶어했습니다.

잉태와 죽음을 일치시키려 한 흔적은 또 있습니다. 예수가 잉태되었던 처녀의 자궁은 아무도 묻힌 적이 없었던 그의 무덤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고대인들은 사람은 잉태된 지 정확히 9개월 만에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3월 25일로부터 9개월 후가 바로 12월 25일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탄절은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을 상기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 성탄절 이야기

복음서에는 두 개의 성탄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은 가브리엘 천사가 나사렛 동네에 살던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의 몸을 빌어 태어날 아기에 대해 전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만삭의 마리아가 요셉과 더불어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갔다가 구유에 아기를 낳는 장면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달려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령 천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눅2:11)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대로 ‘구세주’ 혹은 ‘주’라는 호칭은 당시의 로마 황제에게만 적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의 노랫소리는 로마 황제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도 아니고 사람들의 경배를 받아야 할 ‘주님’도 아니라는 선언인 셈입니다. 기존 체제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선언은 매우 불온한 것이었습니다.

천사와 더불어 나타난 하늘 군대의 찬양은 더욱 놀랍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이 노래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그리고 문화를 통한 식민화에 바탕을 둔 로마의 평화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모든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무력한 자의 모습으로 나신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존재이고, 사랑과 관용과 섬김과 나눔에 근거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처럼 주님의 탄생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마리아와 요셉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는 소박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지만, 꿈에 나타난 주의 천사의 지시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는 헤롯왕 때에 예수가 베들레헴에 나셨다고 내처 말한 후 동방박사가 그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묻고는,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마태가 하려는 말은 예수님이야말로 어둠 가운데 나타난 빛이라는 것입니다. 어둠은 사람들은 실존적인 상황일 수도 있지만, 식민체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탄절 이야기는 몽환적이고 목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세상의 운행을 예감하는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은 매혹적입니다.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그야말로 별(星 혹은 別)천지였습니다. 별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들은 누구나 始原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본다던 윤동주가 아니더라도, 별 하늘은 우리를 생의 신비 앞에 세워놓습니다.

별 하늘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씻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별자리를 눈으로 헤아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견우직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도 있고, 좀생이별과 초승달 이야기, 샛별 이야기 등도 떠오릅니다. 동방의 박사가 별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기 위해 왔다는 그들의 말은 헤롯 왕가에 던져진 폭탄과 같았습니다. “헤롯 왕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였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하였다.”(3) 언제든 역사에 등장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기존 세상의 반응은 ‘당황’입니다. 그들은 늘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은 언젠가 현재의 질서가 전복되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각설이타령의 9월령 가운데는 ‘9자나 한 자나 들고나 보니, 구세주가 와야 할 판’이라는 가사도 나옵니다. 미륵 부처가 하생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민중들이었습니다. 가난한 평민의 집에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아기장수가 태어나는 아기장수설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늘 좌절로 끝나곤 했습니다. 영웅의 탄생을 두려워한 주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은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꿈은 늘 그렇게 좌절되었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왔습니다. 지금 편안한 사람들,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별을 보아도 길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진규 시인의 시를 들어보십시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 전문

해가 지지 않으면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의 눈에는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주님에게로 이끄는 별은 밤하늘을 응시하는 사람들, 그 어둠을 찢고 새벽을 깨우려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납니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들, 남의 고통을 모른 체 하는 사람들은 새 세상 이야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우리 속에 드리운, 역사 속에 드리운 어둠을 찢기 위해 애태우는 사람만 별들을 볼 수 있고, 별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 샛별로 떠오르다

헤롯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문 지식을 동원해 ‘베들레헴’이라는 대답을 내놓습니다. 곡학아세하는 지식인들의 전형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역사의 도래가 아니라,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의 호의를 입고 싶어 하는 마음,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 정신을 누더기로 만듭니다. 공자가 영계기를 만나 “선생은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하고 묻자 “대저 빈곤함은 선비의 떳떳함인 것이다” 하였습니다(孔子見榮啓期, 問曰, ‘先生何樂也?’ 對曰, ‘夫貧者, 士之常也’--說苑․雜言). 마음이 반듯한 사람,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는 사람이라야 떳떳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이 그러했고,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 선 베드로가 그러했고, 베스도 총독 앞에 선 바울이 그러했고, 보름스(Worms) 제국의회 앞에 섰던 마틴 루터가 그러했습니다. 특히 루터의 말은 가슴을 울립니다. 그동안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청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한 행동이며, 양심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내 신념에도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시여, 도우소서. 아멘.”

메시야가 오실 곳을 알게 된 헤롯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아이를 찾거든 알려달라며 자기도 그에게 가서 경배할 것이라 하지만, 음모와 권모술수를 통해 성장한 노회한 정치가 헤롯의 의도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좌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하튼 새로운 생명, 역사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이의 운명은 순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빛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곧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요3:19)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여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좌절될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1:5b)고 표현합니다.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예수님은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찢어 희망의 별을 낳아주셨습니다.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들, 하잘것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 우리도 별이다

예수님은 별을 낳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계22:16b)

빛나는 샛별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삶에 빛을 가져오는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십니다. 이보다 기쁜 소식이 또 있을까요? 슬플 때 곁에 있어 주시고, 길조차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길이 되어 우리를 걷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빛이 되어 누군가의 발 앞을 비추어주는 것이 아닐까요?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는 형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형은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찬란한 빛을 잃어 버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형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고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계속 노력했다.”(출처를 명시하지 않은 나의 수첩 메모)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바로 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5:8)라고 권고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산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일 겁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요일2:9, 11)

잊지 마십시오. 우리도 별입니다. 우리도 어두운 밤하늘을 대면하고 있는 누군가의 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을 어디로 안내하고 있습니까? 동방의 박사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던 그 별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자기 내려놓음이 아니고는 그 별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 우리의 가슴에도 별 하나가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그 별빛을 따라 걷다가 마침내 우리 주님의 현존 앞에 당도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뜯지않은 선물(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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