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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강절]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합 2:1-4)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4111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합 2:1-4)

어릴 때 기억을 되살려보면 저는 시골에서 생활했습니다. 아버님은 공무원이시기 때문에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시골집에 있고 아버님은 직장을 따라서 이곳저곳을 다니셨는데 아버지를 만나는 날은 보통 주말입니다. 토요일이 되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십니다.

저에게 토요일은 다른 날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만나는 날입니다. 혹 운이 좋으면 아버지가 빈손으로 오지 않으시고 과자나 사탕을 사가지고 오면 그 날은 더없이 기쁜 날입니다. 저는 그래서 아버지가 오시는 날을 늘 기대합니다. 토요일이 되면 친구들과 놀다가도 동네입구를 늘 바라봅니다.

‘혹시 아버지가 오시지 않나?’ ‘내가 노는 사이에 아버지가 그냥 집에 가시면 어떡하나?’ 이 생각에 늘 그렇게 동리 밖을 바라봅니다. 딱지치기를 하고 구슬치기를 하다가 친구에게 좀 잃어도 그날은 개의치 않습니다. ‘아버지가 오시는데. 사탕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 멀리 아버지의 형체를 바라보면 달려가서 가방을 들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어린 시절의 기쁨이었습니다. 물론 때론 비가 많이 와서 배를 건널 수가 없어서, 또 도로가 유실되어서 아버지가 오시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다릴 대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그런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 보면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릴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늘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가 딱지치기하면서도 또 한 번 둘러보면서 ‘혹시 아버지가 오시지 않나?’ 하듯이 우리는 밥을 먹던, 직장에 나가던, 생활하던 늘 예수님의 재림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이를 깨어있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이라는 교회 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성탄절 전 40일 동안을 우리는 대림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대림절은 영적각성과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계절입니다. 저는 대림절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여러분! 기다림의 반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안기다림?’ ‘기다림’의 반대는 ‘조급함’입니다. 조급한 사람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기다리다가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3초의 여유’라는 글을 읽어봤더니 이런 좋은 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베이터에 타면 닫기를 누르기 전에 3초만 더 기다리세요. 누군가 급히 엘리베이터를 탈 사람이 급히 오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여러분이 차를 운전할 때 출발신호가 보이거든 앞차가 서 있어도 경적을 누르지 말고 3초만 기다리세요.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혹 내 앞에 끼어드는 차가 있더라도 3초만 서서 기다리세요. 그 사람의 아내가 정말 아파서 촌각을 다퉈 병원으로 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들은 늘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성급합니다. 조급한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대림절에 기다림에 지혜, 기다림의 미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산모는 아이를 임신하면 출산하기까지 좋든 싫던 10개월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10개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출산해 버린다면 우리는 그런 아이를 미숙아라고 부릅니다. 인큐베이터에 넣어서 더 보호를 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건축할 때도 시공을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실공사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부실공사는 늘 붕괴의 위기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기다림에 역사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삭을 낳기까지 25년 동안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난 이후에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21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갔는데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때까지 13년이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의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되기까지 80년이란 세월을 기다리고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기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던한 기다림이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박국 2장에 말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신흥 바벨론제국이 부상하고 앗시리아가 멸망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이제 유다를 침공해 들어오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공포로 괴로워합니다.

그때 하박국 기자는 하나님 앞에 이런 몇 가지 질문을 가지고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째서 바벨론 같은 악인이 저렇게 득세하고 잘되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이 유대백성이 이 고난을 당해야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백성을 징계하시는데 형편없는 이방인들을 왜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보니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오늘 이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우회적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지금은 바벨론이 부상하고 그들이 너희 민족을 괴롭힐지라도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메시아를 보내줄 것이고, 메시아가 이스라엘에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줄 것이다.” 아마 직접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날을 의미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다시 오실 메시아, 재림의 주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날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십니까? 아마 질병이 깊은 분들은 건강의 회복을 기다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경제 불황 가운데서 기업을 운영하는 분들은 이 경제 불황이 빨리 떠나가고 사업이 회복될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수험생들은 합격 소식을 기다릴 것입니다. 총각 처녀들은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을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되 조급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성도인 것입니다.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17년 동안 오지에서 고생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흉악한 몰골, 그 비쩍 마른 몰골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는 사자에게 한쪽 발이 참으로 잘릴 뻔 한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의 온 몸에는 맹수들에게 받은 상처로 여기저기 흉터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리빙스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같이 연약한 사람이 그 아프리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어떻게 17년 동안이나 견딜 수가 있었습니까?" 그럴 때 리빙스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 말씀 때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 때문에 나는 그 오지에서 맹수들과 싸우면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더 좋은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조급함보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이 자기 선조들을 다 불러놓고 손자, 손녀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얘들아!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의 늑대는 아주 악한 늑대야. 미워하게 만들고, 살인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드는 그런 나쁜 늑대지. 그러나 또 한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그 늑대는 아주 착한 늑대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평화하게 만들고, 용서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들고, 인내하게 만드는 그런 착한 늑대가 있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손자 중에 한 명이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 마음속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다 살고 있겠네요?”
“그럼! 내 마음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있지.” 손자가 또 묻습니다.
“그럼 그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대답합니다.
“할아버지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착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착한 늑대가 이기고, 악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악한 늑대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마음에도 두 마리의 늑대가 있습니다. 조바심의 늑대가 있고, 기다림의 늑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가운데 오늘 기도할지라도, 때로 그 응답이 늦어서 낙심하고 좌절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녕 그 약속은 응할 것이고, 비록 늦을지라도 반드시 응하리라고 주님은 약속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이 승리의 약속을 믿고 오늘도 하루하루를 기다림과 인내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대림절은 영적 준비의 계절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결혼풍습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결혼이 결정되면 결혼식이 한 주간 동안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고한 날에 신랑이 갑자가 신부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결혼예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신랑이 올 날이 정확히 알 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부의 가정에서는 긴장을 하고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신부는 몸단장을 하고 기다리는데 그 신부의 열 친구들이 오늘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몸단장을 하고 신부처럼 이제 등 위에 기름을 채워서 기다립니다. 그러다 한 밤중에 신랑이 오면 그 등잔에 불을 켜서 그것을 들고 나가서 신랑을 맞이하게 되면 결혼식이 시작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까 신랑이 늦게 왔다고 했습니다. 밤이 깊도록, 신랑이 늦게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10처녀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신랑이 왔다는 소리가 들리자 자다가 허겁지겁 일어나서 등잔에 불을 켜고 나가서 신랑을 맞이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마태복음 25장 2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있는데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아마 등에 기름이 다 닳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기름을 부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여분의 기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들은 여분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등을 채워서 등불을 켜고 신랑을 맞이하고 그 결혼식의 축복에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미련한 처녀들은 이야기합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너희의 기름을 우리에게 좀 빌려 달라.” 기름은 나눠줄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의 필요를 가게에 가서 사오라고 명하십니다. 가게에 가서 문을 두드려 가서 기름을 사가지고 오지만 이미 결혼식장에 문은 닫혔고 미련한 처녀들은 결혼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그런 슬픔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 중심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기름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마태복음 25장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절에 보니까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나중에 와서 미련한 자들은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신랑은 그들을 가리켜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데 여기에 바로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등과 기름이 있습니다. 등과 기름은 무엇일까요? 등은 우리 신앙의 형식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함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찬양할 수 있고, 함께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것입니다. 함께 예배를 드려도 동일한 예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말 성령이 충만해서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재를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 신앙의 질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기름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진실한 삶을 살았느냐? 네가 얼마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했느냐? 너희가 참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봉사하고 예배하고 기도했느냐?”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기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가 가지는 타이틀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장 되신 주님 앞에 설 때에 “내가 목사입니다.” 혹은 “내가 권사입니다.” “내가 집사입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떤 내면에 신앙의 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겨왔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름입니다. 여러분 여기 열 처녀들은 누구를 가리킵니다.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교회는 등과 기름을 준비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지만, 지혜롭지 못한 교회는 기름이 부족해서 그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오늘 깨어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그 기름을 준비할 수 있고, 주님이 오실 때 언제든지 나가서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이 비유의 결론은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랑 되신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자지 않고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하는 영성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늘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요, 바로 주님의 재림을 의식하는 삶이 깨어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박국 2장 1절에 보니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고 하박국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루에 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외적의 공격이 있는지 늘 깨어서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서두에 저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기다리던 제 모습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렸습니다. 제가 또 한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면 제가 사는 시골에서는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립니다. 5일, 10일, 15일, 20일, 25일, 5일마다 장이 열립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장날이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장을 보러 시내로 나가십니다. 농사짓는 것을 가져다 파는 경우도 있고,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서 장날이면 장에 나가십니다. 장에 나가기 전에 형들은 다 학교가고, 위에 두 누나와 제가 어리니까 아직 학교를 못가고 집에 있습니다. 그러면 큰누나에게 꼭 당부하십니다. “동생 데리고 오늘 집 잘 보고 점심 챙겨주고 비가 오면 빨랫줄에 빨래도 걷고, 널린 고추도 좀 잘 비 안 맞도록 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또 마당에 펴 놓은 옥수수도 닭들이 쪼아 먹지 못하도록 좀 잘 돌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집을 잘 보고 있으면 올 때에 빵을 사가지고 오겠다거나 그런 약속을 하고 가십니다.

그럼 우리들은 엄마가 올 시간을 기다립니다. 놀다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가와도 빨래도 걷지 못하고, 고추도 널은 것 걷지 못해서 비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또 너무 심하게 장난을 하다가 그만 뭘 던져서 거울을 깬 적도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가 전혀 기다려지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가 안 왔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오셔서 혼날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것입니다. 어머니가 오셔서 사탕도 먹고, 과자도 먹어야 하는데 잘못한 것이 많아서 어머니가 두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혜로운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는 성도들은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한번은 학교에서 학기말 고사를 보는데 저녁에 저녁 먹고 이제 시험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랬더니 졸음에 잠깐 눈을 감고 누웠더니 아침 닭 우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큰일 났다. 시험을 이제 망쳤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나라가 흉흉하다는데 전쟁이나 났으면 좋겠다.’ 시험을 볼 자신이 없으니까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들었더니 그 목사님은 자기가 어릴 때 시험 날이 되었는데 공부를 하나도 못했답니다. 그런데 아침에 “야! 오늘 학교 가지 마라. 오늘 학교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지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교에 불이 났는데 너무 좋아했다고 합니다. 시험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어릴 때 철없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갑자기 오신다면 우리가 기쁨으로 나아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준비된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영적인 기름을 준비한 사람만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무언가 해결할 것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 용서할 것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자리가 두려울 것입니다. 책망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두 개의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의 종말이고 하나는 개인의 종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은 재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지고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종말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재림의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의 부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무개야! 내가 너를 데려가겠다.”하고 불러 가시면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나를 언제 불러 가실까를 생각하면서 개인적인 종말도 잘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자기가 아는 서울에 있는 장로님이 광주에 출장을 가겼답니다. 광주시내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큰 트럭이 큰 통나무들을 가득 싣고 지나갑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덜커덩 하면서 그 통나무들을 묶은 밧줄이 하나 풀어졌답니다. 그래서 그 차에서 통나무들이 와르르 굴러 떨어지며 횡단보도에 서 계시던 장로님을 쳐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상상 못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영락교회에서 부목사를 하시던 어떤 목사님이 나오셔서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영락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지구에 심방을 가려고 구역장 권사님과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권사님! 다음 주 화요일에 어느 가정 심방 갑시다.”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으니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 분리수거하러 주차장에 나갔다가 후진하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보지 못해서 차에 치어 넘어지며 뇌진탕을 그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부르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나를 부르시더라도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준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제가 한 두 주전에 저희 노회 원로목사님이시고 교단 총회장을 지내신 한 목사님 어머님이 소천 하셔서 전라도 익산에 있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과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는데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머님이 권사님이신데 나이가 90세가 다 되셨다고 합니다. 서울에 모시고 계셨는데 그만 시골에 좀 가고 싶다고, 답답하다고 하셔서 고향인 시골에 모셔다 드렸다고 합니다. 시골에 가셔서 몇 달동안 잘 생활하셨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그 직전 주일에 장전교회라는 교회에 나가서 매주 예배를 드리셨는데 그 교회 목사님에게 “목사님! 제가 오늘 예배 때는 특송을 하고 싶으니 특송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이 권사님은 특송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분이었는데 목사님은 권사님이 간곡히 부탁을 하니까 특송을 할 기회를 드렸습니다. 권사님이 회중 앞에 나가 주일에 특송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간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돌아가시는 그 당일 새벽기도까지 다녀오셨습니다. 그 전날은 손자들이 마침 방문했는데 그들을 붙들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잘 드시고 졸음이 온다고 좀 쉬시겠다고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랫마을에서 누가 떡을 해 가지고 왔기에 어머니 이것 좀 드시라고 며느리가 방문을 열었더니 그만 누워계시는데 조용히 점심 잘 드시고 누워계시다가 그냥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떡만 못 드셨지. 하실 일은 다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종말입니다. 권사님은 아마 어찌 보면 자신의 마지막 임종을 예감하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 하시던 특송, 90년 만에 처음 교회에서 특송도 하시고, 새벽기도까지 갔다 오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아니 하나님이 나를 언제 나를 불러 가실지라도 우리는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그리고 우리의 등에 기름을 준비한 준비된 신자만이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면서 오늘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고 늘 깨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있는 자유함(고후 3:6-18)
대림절에 돌아보는 믿음(눅 1:2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