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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강절] 새 천년의 시작(눅 2:21-39)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9047    

새 천년의 시작(눅 2:21-39)

교회력의 시작은 대강절(Advent)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교회력으로는 신년이 되며 따라서 대강절 첫째주일이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셈이다. 대강절 첫째주일은 해마다 11월 27일에서 12월 3일 사이의 어느 한 날에 온다. 그리고 대강절은 늘 4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대강절절기는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22일에서 28일간의 길이를 가진다. 대강절이란 뜻은 "도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공항에서 혹은 기차역에서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식구들이나 손님을 가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대림절)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강절을 지키는 의미는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주탄일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또한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격과 기쁨이다. 말구유 같은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구주성탄절은 사망과 어두운 그늘 밑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고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벅찬 가슴으로 살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이 시대를 용기와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절이다. 말씀의 선포뿐만 아니라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눈길을 소외된 자들에게 돌리고 아직도 어두움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처음오신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오시게 된다. 초림의 주님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주의 당당한 모습을 말씀하고 있다. 재림하실 주님은 심판이 주 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심판을 통해 상 받을 자와 벌받을 자를 갈라놓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땅의 것보다는 하늘의 것을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구주탄일을 앞두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이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시한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예수의 부활 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두고 이 땅위에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으로 항상 역사하고 있다.

오늘 주일은 대림절 2째 주이다. 대림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준비한다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나는 날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으로 기다림의 의미를 포함한다.

예수 이전 700년 전에 이사야는 "한 아기가 목자처럼 우리를 돌볼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미가는 "베들레헴에 나신다"라고 예언하고 있다. 실제로 목자들에게 첫번 크리스마스가 전해졌었고, 동방박사도 시골 베들레헴까지 찾아 아기에게 경배하였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는 지식이 바로 산지식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자신의 모든 지식을 버리고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요즘 병 고침을 보고 믿는 상황이 우리의 주변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신학적 이론이 우리의 신앙 밑바닥에 깔려있어야 한다. 동방박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기독교는 믿고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 부르면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년 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초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1999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를 마구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원할 구주로 오신 예수와 죄인을 불러 친구로 삼아 죄 사함 받게 하시고 섬기는 종으로 고요하게 오시는 예수를 그들은 기대밖에 두고 있었기에 구주 오심의 의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구약 역사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이다. 그 약속이나 예언이 모두 예수의 오심을 두고 한 말이다. 약속은 기다림이고 구주탄일은 오심이며 예언은 기다림이고 허락은 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고 복음은 오심이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니라(눅2:12)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인류의 구주이시다. Martin Luther는 강보와 구유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대로 오셨지만 감추어진 모양으로 계시 되셨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과 참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남루한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인 아기만 보고 인류의 구세주는 발견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죄인처럼 돌아가신 분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지금도 이런 모양으로 오신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면서 정녕 기다리던 메시야가 정말 오실 때는 영접하지 못하고 실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는 그래서 세상을 지으신 이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1:2)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헐벗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그를 돌보았나?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예수는 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소 이렇게 오셨고 또 이런 사람을 찾아가시고 이런 모양으로 오신다. 만남의 기쁨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들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확실성이라는 삼불(三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해탈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해 왔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 즉 하나님께 나가기를 희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희구와 노력이 바로 종교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고 갖가지의 종교가 이 땅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불안의 시대'라는 것을 핵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폴틸리히(P. Tillich)는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이며 더욱이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고 했다. 인구의 폭발, 환경의 오염, 자원의 고갈, 그리고 핵무기의 공포에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을 비롯해서 현대 지성인들이 '앞으로 100년을 존속하기 어려우리라'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갖는다. 그래서 EC당국은 이에 '아이는 둘만 낳고, 기술대신에 예술을 숭상하고, 개발 대신에 자원을 아끼고, 그리고 난 다음 역사의 종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딤전 3:1에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야기될 인간사회의 도덕적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자기사랑, 돈사랑, 교만, 부모거역, 무절제, 배반, 쾌락사랑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역적상태를 말하고 있다. 마태 24:5에 말세의 특징을 거짓 선지자 횡행, 기근과 지진 등 재난이 심하고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의 소식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의 식어짐을 경고하고 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금이 종말의 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긴급한 때이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주님의 재림에 준비해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24:44)고 경고의 말씀을 준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악한자가 받는 형벌은 이 땅에서도 흔히 있다. 그러나 주의 재림을 통해 주어지는 심판 때는 인간의 상상을 넘을 것이다. 이런 자는 모든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고'(히10:27)있는 자들이다. 심판은 결코 형벌을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 심판은 있다.

오늘 주일은 대강절 둘째 주일이다. 주님의 구주탄일을 앞두고 2천년 전에 이미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는 축복을 받아야 하고 또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절기로 삼아야 한다. 대강절을 맞으며 오신 주님을 구주로 믿는 현재의 경험과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미래의 경험될 것을 신앙화 하여야 한다. 연말의 들뜬 기분과 상혼에 지배되던 정신과 습관에서 벗어나 작고 조용한 베들레헴 마을에서 소박한 말구유에 탄생하신 주님을 맞기 위하여 결정적이고도 필수적인 준비기간을 살아야한다.

이제 대강절의 메시지는 예언의 성취와 준비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재림을 대망 하는 자에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한다. 이것은 새 천년의 대림절을 지키는 자리에 초대교회가 사순절과 함께 참회의 절기로 지키는 의미를 새 천년의 교회가 다시 구현해가야 한다.


임마누엘(마 1:23)
기다림(애 3: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