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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신예배] 제직 헌신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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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직 헌신 예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행 20:17-25)


사도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죽음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올라 기시던 마지막 발걸음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바울이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밝힘으로써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의 의미를 깨닫기 바랍니다.


1. 성령님의 지시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말이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환경을 따라서나 어떤 인간적 유익을 쫓아서나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지시한 것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말입니다.


그가 마케도니아로 갈 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세아로 가서 복음 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고 마케도니아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의 일을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하고 자기 기분 내키는 데로만 해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좋은 것도 하고 내 마음에 안 맞는 것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울면서 씨를 뿌린다"고 하시고 에레미아는 울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 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렘 20:9-11]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 성령님에게 매여 그의 지시를 마음으로 받고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 점에 있어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지시하시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해야 하며 하나님의 종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이 잘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로워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사명 때문에 갑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이 가진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고난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할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남 보다 더 잘살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명자가 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다른 삶 보다 더 잘되기 위해서도 아니오 어떤 성취 욕을 만족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명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 가운데서도 가장 고상한 사명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는 이런 사명감을 가진 일군을 필요로 합니다. 신학교에 가면 이것저것 다 해보다가 잘 안되니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일군 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신학교에 들어와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직업을 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물른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죽어도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 더욱 더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재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느 날 부동산 중개 사무소에 무슨 일로 들려 목사라고 했더니 사장이라는 사람이 “요세 교회 사업이 잘되는 것 같은데 목사가 되려면 얼마나 드느냐”고 물어 실소를 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직도 돈 드리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 투표를 했는데 떨어진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그렇게 헌금을 많이 했는데도 장로 투표에 떨어지면 얼마나 더 헌금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떨어져야 교회가 평안할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무 도시에 가서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재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일을 위해 고난도 멸시도 받을 줄 알아야 하고 우리의 것을 우리 것이라 하지 않고 드리는 헌신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인정을 뿌리치고 갑니다.

본문에도 있지만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에베소 장로들도, 빌립의 딸들도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만류를 합니다. 그래도 바울은 갑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인정에 너무 매여서는 안됩니다. 인정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혼돈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극명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장가간 사람도” “아버지가 죽은 사람도” 일단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인정이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 보다 더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민수기에서 고라, 아비람, 다단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모세를 배신했을 때 그와 동조한 250명의 족장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족장들이 죽고 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 회중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회막을 바라본즉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민 16:41-42] 그 백성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에 끌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원망하고 핍박을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징개를 두려운 것이 였습니다.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염병이 그치매 아론이 회막문 모세에게로 돌아 오니라"[민 16:49-50]


동정심에 끌려 죄를 짓는 사람과 함께 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사람과는 단절을 해야 합니다.


다미엔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와이에 문둥병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단신으로 모로코 섬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와 국가와 종교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외면 당해 온 문둥병자들은 철저하게 그를 외면하고 다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의 헌신적인 선교로 그 저주의 섬에 이윽고 한 사람 두 사람의 신자가 생겨나게 되고 서서히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문둥병자들은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다미엔의 복음 사역을 거절하고 방해하였습니다. 다미엔은 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문둥병자들이 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저 사람들과 같은 문둥병을 내려 주옵소서...그래서 저도 그 천형의 고통을 함께 누리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모로코 섬에 들어간지 6년째 되는 어느 아침에 다미엔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 물을 끓이게 되었고 그 뜨거운 물이 실수로 자신의 발등에 떨어지게 되는 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 뜨거운 물이 발등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뜨거움도 아픔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다미엔에게도 그 문둥병이 덮쳐 왔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다미엔은 그 자리에 끓어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저 문둥병자들에게 설교할 때에 여러분...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는...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 문둥병자가 아니라 우리 문둥병자들은...이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기쁨의 문둥병을 주시 오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자의 모습을 가지지는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써 최선을 다한 헌신이 있어야 교회가 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4.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께 구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을 때 모세는 아론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금송아지를 만들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격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다 해 놓고서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했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그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것으로 만족해했습니다. 사람의 위로가 없으니 주님께서는 바울이 로마로 가는데 몇 번이나 격려하시고 위로하십니다. 행 18:9, 27:23, 23:11,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이것이 바울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이 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복음 증거를 위해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가 넘치는 줄 믿습니다. 바울의 이런 헌신으로 마침내 로마는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는 기독교 국가가 되였습니다.


전해 오는 바로는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간악한 유대인들에게 모략을 당하여 체포 되였으나 그가 로마 사람인 것을 안 로마의 총독이 바울을 놓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 하고 로마에 가서 2년 동안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중에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를 통일했을 때 황제를 도와 기독교를 국교화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위한 헌신은 언제고 간에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으로 기도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22 2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