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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전을 1억 1만 3천번 읽은 김득신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833    

조선의 오타쿠 열전 - 백이전을 113천번 읽은 김득신

 

17세기의 문인 김득신(栢谷)은 엄청난 노력가였습니다. 그는 현대의 오타쿠, 폐인, 독서광을 모두 합해 놓은 듯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김득신의 아버지는 김치라는 인물로, 그는 임진왜란의 영웅 김시민의 양자였습니다. 본래 북인이었으나 인조반정 직전에 서인 편에 가담하여 반정의 공로로 경상도 관찰사를 제수받은 인물입니다. 천문에 아주 밝았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에 대한 일화를 잠시 소개하자면,

 

일찍이 김공이 자신의 사주를 중원의 술사에게 물으니 한 구의 시를 써서 주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았다.

 

화산의 소탄 나그네

 

머리에 일지화(一枝花) 꽃았도다.

 

그 당시에는 그 뜻을 깨닫지 못했는데, 영백(嶺伯)이 되어 순행하다 안동부(安東俯)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학질을 앓게 되었다. 병을 고치는 방법을 두루 탐문하니, 혹자가 당일 검은 소를 거꾸로 타면 즉시 치료된다고 운운 했다. 그래서 혹자의 말에 따라 소를 타고 마당 안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소에서 내려 방에 눕자마자 두통이 매우 심한지라 한 기생에게 안마를 시키고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니 일지화(一枝花)라고 대답하였다. 김공은 중원 사람의 시구가 생각나 탄식하며 말했다.

 

죽고 사는 것에는 명이 없도다.”

 

이에 새 자리를 펴라고 명하여 새로 지은 옷으로 갈이 입은 후 의관을 다 갖추고 베게를 반듯이 벤 후 숙연하게 서거했다. <청구야담>

 

이런 김치의 아들인 김득신은, 노자의 수호를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태몽에 노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김득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김득신의 두뇌는 아버지의 기대에 극히 못 미치는 상태였죠. 그러나 김치는 인내를 가지고 김득신을 교육했습니다.

 

김득신은 스무 살이 되어서야 드디어 글 한편을 짓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한번의 쾌감을 맛본 김득신은, 이후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사기의 <백이전>은 무려 113천번을 읽었습니다. 지금의 숫자로는 113천번이 됩니다.

 

백이전(伯夷傳)113천 번을 읽었고,<노자전><분왕><주책><능허대기><의금장><보망장>2만 번을 읽었다.<제책><귀신장><목가산기><제구양문><중용서>18천 번,<송설존의서><송수재서><백리해장>15천 번,<획린해><사설><송고한상인서><남전현승청벽기><송궁문<<연희정기><지등주북기상양양우상공서><응과목시여인서><송구책서><마설><후자왕승복전><송정상서서><송동소남서><후십구일부상서><상병부이시랑서><송료도사서><휘변><장군묘갈명>13천번을 읽었다.<용설>2만 번 읽었고,<제악어문>14천 번을 읽었다.모두 36편이다.

 

<백이전><노자전><분왕>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유종원의 문장을 읽은 까닭은 정밀하기 때문이었다.<제책><주책>을 읽은 것은 기굴해서고,<능허대기><제구양문>을 읽은 것은 담긴 뜻이 깊어서였다.<귀신장><의금장><중용서><보망장>을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고, <목가산기>를 읽은 것은 웅혼해서였다. <백리해장>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한데 뜻이 깊어서이고, 한유의 글을 읽은 것은 스케일이 크면서 농욱하기 때문이다.무릇 이둘 여러 편의 각기 다른 문체 읽기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갑술년(1638)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사기>,<대학><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에는 싣지 않았다. 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괴산 취묵당(醉墨堂)에서 쓴다. <독수기>

 

김득신은 또한 시를 잘 썼는데, 시에 너무 미쳐 있던 탓인지, 시에 관한 실수 이야기가 많습니다.

 

김득신은 괴로이 읖조리는 벽()이 있었다. 시에 몰두할 때면 턱수염을 배배 꼬며 형상조차 잊었다. 그의 아내가 어쩌나 보려고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 양념장은 두지 않았다. 아내가 물었다. "간이 싱겁지도 않아요?" 그가 말했다. "? 어쩌다 보니 잊어버렸어." <동시화>

 

김득신은 지혜가 부족하고 재주가 몹시 노둔했는데도 외워 읽기를 몹시 부지런히 했다. 독서록이 있었는데 천 번을 읽지 않은 것은 기록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중에<백이전>같은 것은113천 번을 읽기에 이르렀다. 뒤에 한번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 집을 지나가는데,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말 고삐를 끌던 하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학자(夫學者) 재적극박(載籍極博) 어쩌고저쩌고 한 것은 나으리가 평생 맨날 읽으신 것인데 쇤네도 알겠습니다요. 나으리가 모른신단 말씀이십니까?"

 

김득신은 그제서야 그 글이<백이전>임을 깨달았다. 그 노둔함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만년에는 능히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김득신이 또 한 번은 '풍지조몽위(風枝夢危)' '바람 부는 가지에 새의 꿈이 위태롭고'란 한 구절을 얻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알맞은 대구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새벽에 집안 제사를 지낼 때였다. 가을 밤이라 달이 밝고 이슬은 흰데 벌레소리가 뜨락에 가득했다. 막 제주(祭酒)를 올리려는데 갑자기 '노초충성습(露草蟲聲濕)' '이슬 젖은 풀입에 벌레소리 젖누나'란 구절이 떠올랐다. 앞서의 구절에 꼭 맞는 대구였다. 마침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더니만 잔을 높이 들어 자기가 마셔 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비록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 해도 반드시 내 이 술 마신 것을 칭찬하셨을 게야." <지염수필>

 

그는 당호를 <억만재(億万齋)>라 할 정도로, 그리고 <독수기>에 자신의 노력을 모두 기록할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서우는 백곡 김득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목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기를 억번 만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어려서 깨달아 기억을 잘한 사람은 세상에 적지 않다. 날마다 천 마디 말을 외워 입만 열면 사람을 놀래키고, 훌륭한 말을 민첩하게 쏟아내니, 재주가 몹시 아름답다 하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저버려 게으름을 부리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그만두어버리고, 늙어서도 세상에 들림이 없으니, 공과 견주어본다면 어떠하겠는가?‘

 

* 김득신 (1604~1684)은 아버지 김치의 음보로 참봉이 되었으며 현종 3(1662)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안풍군의 작위를 내려받았습니다. 1684년 화적에게 살해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곡집>, <종남총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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