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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개론 - 제7장 20세기의 오경 고등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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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20세기의 오경 고등비평

 

아이스펠트(Otto Eissfeldt)는 그의 책 <육경의 개요(Hexateuchsynopse,1922)>에서 스멘드(Julius Smend)가 <육경의 기원에 대한 연구(Die Erzåhlung des Hexateuchs auf ihre Qullen untersucht,1912)>에서 명명한 J1 과 다소 유사한 기본자료 L을 J에서 발견해내었다고 생각하였다.이 L을 가나안의 생활양식에 완전히 적대적인 유목민적,레갑인(Rechbite)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그는 L이 엘리야 시대(약 B.C. 860)에 등장하였고 사사들과 사무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L과 약간 유사한 것이 새로운 문서인 K(겐 족속,즉 Kenite를 가르킴)이다. 이것은 모세의 생애중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이스라엘과 겐 족속과의 관계를 다룬다.이것은 모르겐스테론(Julius Morgenstern, The Oldest Document of the Hexateuch,1927)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는 이것이 열왕기상 15:9-15에 있는 아사왕의 종교개혁에 기초가 되었다고 가정하였다.(약 B.C.890)

 

1.하나님의 이름이 문서의 기준으로서 정당한가?

이미 1893년에 클로스터만(August Klostermann, Der Penateuch)은 맛소라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승하는데 있어서 무오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문서의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MT와 LXX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던 요하네스(Joannes Dahse,"Textkritische Bedenken gegen den Ausgangspunkt der Pentateuchkritik"<오경비평의 초기 전제에 대한 본문 비평적 의심들>, 1903)에서 LXX이 180회 이상이나 야웨를 데오스(하나님)로서, 엘로힘(하나님)을 퀴리오스(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MT가 이름을 전승함에 있어서 문서설주의자들이 시도한 바와 같이 아주 미묘하고 정확한 자료의 구분을 하는데 기초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는 위너(Harold M. Wiener)가 LXX인과 MT사이의 동일한 차이점을 1909년에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구절들 중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료구분을 한다는 것은 비실제적이고 무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레이든 대학 교수 후계자 어드만스 (B.D. Eerdmands)는 70인역의 통계에서 제시된 이 논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리된 문서들을 찾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레위기의 의식들 중 많은 것들이 모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구나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전설들의 근본적 통일성이 그라프-벨하우젠 학파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그러므로 어드만스는 문서설 학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라프-쿠에넨-벨하우젠의 이론의 정당성을 부인하였다.

노르웨이의 학자 모빙켈(Sigmund Mowinckel)은 양식 비평에서 J-E의 문서설을 공격하였다. 그는 E가 북조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임도 부인하였다. E는 가끔 여호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출애굽기 3:14이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야웨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절은 여호와가 히브리인들에게 이미 알려졌음을 전제한다고 말했다.

올브라잇(W.F. Albriht)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말을 하였다. 예를 들면, 사무엘서부터 열왕기까지 보다 오경이 편집상의 차이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받아들여진 텍스트에서 흠이나 불일치되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또 다른 자료와 문서를 계속 찾아내는 것과 가정적인 분석을 계속 넓혀 가는 것에 대해 많은 경고들이 이미 있었다. 문학적-역사적 문제에 대해 이렇게 주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항상 의심을 사게 되고 비합리적이 된다고 말했다.

 

2. J, E, P가 분리된 문서로 출발했다는 점을 반박함

헤르만 궁켈(Herman Gunkel)은 양식비평을 이렇게 정리한다.

⑴ 옛 시대의 문학사를 정확하게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기록된 문서들의 발전과정을 일관성 있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텍스트 자체의 자료들이 상충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라프-벨하우젠의 가설이 제시한 가상적 문서들에 대해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⑵ 오경문학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 접근은 문서설주의자들의 분석 비평적 관심이 아니라 종합적 창의적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원래의 자료들이 구전 상태에 속해 있었던 여러 종류들의 양식들을 찾고 포로기 혹은 그 후기로 가정되는 최종적 기록형태의 시기까지 있었던 이 구전의 단위들이 각각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3)종교 사학파(relionsgeschichtliche Schule)의 방법론을 실습하는 자로서 궁켈은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이방의 인근 국이 믿고 표현한 그 종교와 문헌들의 현상중 대조가 되는 것들을 연구했고 그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을 통하여 이 다른 형태들이 어떤 생활의 상황에서 나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계속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창세기는 그 대부분에 있어서 사가들을 집대성한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후대에 기록된 형태로 최종 마무리될 때까지 상당히 유동적인 구전을 통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 이후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 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사실 고고학에 의해 여태까지 발견된 히브리어 파편 중 최초의 것은 게제르 월력(Gezer Calendar, 약 B.C. 925)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근국가에서는 그보다 이미 수세기 전에 모든 종류의 문학작품을 기록된 형태로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반도에 있는 터어키 옥(玉)을 채집하던 셈계의 가난한 광부들도 B.C. 1500년 경에 이미 초서체의 알파벳 비문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 땅 북부에 툭 튀어나온 우가릿에서도 알파벳으로 된 그들의 이방 종교의 경전을 갖고 있었다.

1931년 코펜하겐의 페더슨(Johannes Pedersen)은 『구약성경의 구성』(Die Auffassung uom Alten Testament)이란 책에서 문서설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① 여호와와 이브람 사이의 대화, 소돔과 관련된 주기(싸이클), 야곱과 에서의 설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와 같은 J와 E의 이야기들은 포로 후 시대까지 현재의 기록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아주 옛날의 것들이다(즉, 이 범주에 있는 J와 E의 구성 요소들은 문서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850, 750년 보다 훨씬 더 고대의 것이며 또한 제사적 문서만큼이나 후대의 것이다).

② 일반적으로 J와 E를 구분하는 것은 고대 셈계의 설화에 서양의 관점을 억지로 집어넣고 이스라엘인들의 심리적 작용에 무리를 가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③ D 문서를 문서설 주의자들과 같이 엣 요소와 새 요소로 엄격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신명기에 편만한 반―가나안적 경향은 신명기가 포로 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는 포로 귀환 후에 비로소 D가 그리는 바와 같은 독자적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명기가 요시야 통치 때 편집되었다는 성을 버리게 한다.

④ P 문서로 말하자면 그 체계적 배열과 어투의 스타일에서 그것이 포로 후기의 작품임을 명백히 알 수 있지만 많은 율법적 규례들에 있어서 포로 이전의 상황들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법들의 경우는 다욱 그러하다. 우리는 벨하우젠이 모세의 자료에서 분리시키려고 하던 B.C. 850년 문서와 B.C. 750년 문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토라의 최초 단위가 출애굽기 1-15장에 있는 모세의 진실과 유월절 전설이었다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3. J가 E보다 앞선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1920년 『신명기와 십계명』이란 책에서 켄너트(R.F. Kennett)는 J가 아니라 E가 가장 최초의 기록된 문서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B.C. 650년에 북조 이스라엘의 혼혈백성들에게 의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J는 그 얼이 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정당성을 지닌다는 곳에 대한 반박으로 남부 헤브론에서 쓰였다고 했다. 그 연대는 615년이었다. 이 J는 아마 예레미야 8:8에 예레미야가 언급한 바가 있는 “그러나 보라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이 썼도다”라는 문서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4. E가 J 후대의 문서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폴 볼츠(Paul Volz)와 루돌프(Wilhelm Rudolph)는 1933년 『해설자로서의 엘로히스트:오경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란 표제로 공저를 내었다. E의 단락들을 세심히 재검토한 후 그들은 독립된, 그리고 일관성 있는 E 문서라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단지 J의 일부이거나 혹은 보충일 뿐이다. 볼츠는 J와 E를 구분하지 말 것과 구 보충가설과 유사한 것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하였다. 창세기에서는 우리는 단 한 명의 이야기 기록자(J)를 만날 뿐이며, E는 자기 내용 몇 개를 삽입했을지도 모를 후대의 J편집자일 뿐이다. P는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았으며, 그는 단지 법규들의 기록자요, 창세기 1, 17장과 같은 교리적 부분을 편집했을 뿐이다.

 

5. 신명기는 요시야 시대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반박

다 베데(De Wette)가 신명기를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하고 요시야 왕게게 B.C. 621년에 봉독한 책이라고 주장한 후 신명기의 요시야 시대설은 모든 하우젠 학파에 의해 “현대 학문연구의 확실한 결과” 중 가장 확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벨하우젠 역시 그의 『서문』(Prolegomea)에서 선언하였다. “신명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과학적 결과를 올바로 평가하는 모든 학자들은 신명기가 발견된 것과 같은 때에 구성되었으며 그것이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한 세대 전에 있었던 요시야 종교개혁의 규칙을 만들었다.”

 

6. 신명기의 초기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1919년 케겔(Martin Kegel)은 『요시야의 종교개혁』(Die Kultusreformation des Josias)을 쓰고 신명기 연대를 621년으로 잡은 것이 건전하지 않다고 하였다.

1924년 에딘베라의 웰치(Adam C. Welch)는 B.C. 7세기에 “단일성소에 대한 율법”을 공포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된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D 안에 있는 율법 규정 중 많은 것들이 후대 유대의 왕정정치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의 논문에서는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때 신명기와 언약의 책(출 20-23장)을 포함한 핵심적 율법들을 소유한 조직된 공동체였음을 주장하였다. 모세 율법의 다양한 지역적 전통들이 통일왕조를 세우는 문턱에서 사무엘에 의해 종합되었다(참조, 삼상 10:25). 이 배경은 사경(四經)의 배후 자료들이 다양한 요소를 가지며 연속성이 없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해 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예루살렘의 카우프만이 P가 D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D와 그리고 그와 상관된 문학만이 중앙화 사상의 영향력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 아이디어가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요시야는 그것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유대주의는 중앙성전과 선택된 도시의 이미지로 받게 된다. 이 당시에 발전된 제사장 법규들이 이주된 아이디어를 침묵으로 외면해 버렸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7. 신명기의 후대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다 흩어져 정착한 후에 모든 남자들이 그들의 가정과 농토를 버려두고 1년에 세 차례 이상씩이나 수 일 혹은 수 주 동안 단지 몇 개의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예식에 참석하도록 법관들이 법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지도 하의 유대인 남은 자들이 땅에 새로 정착한 후 신명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만약 신명기가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새로 정착하고 아직 다함께 모여 살고 있을 그때를 명백히 그르치고 있다면 이 구체적 규례들은 신명기 자체가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그 때와 배경<신1:1-4>,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부 직전에 모압 평지에 모여 있을 때<약 B.C. 1400년>에 쓰여졌다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싶다. 그러나 휄셔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휄서의 이 결론에 대해 페더슨은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신명기에 편 만한 반가나안 성향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시대의 반외국정신을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페더슨 역시 이와 같은 반가나안 정신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즉 철저하게 썪은 가나안인들의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일 그때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경 비평과 벨하우젠 가설에 대한 20세기 학계의 동향을 이렇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최저선에서 살펴볼 때 이 시대는 19세기의 문서이론이 세워둔 산뜻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를 붕괴시키는 시대였다. 그라프―벨하우젠 체제를 지탱해 주던 대부분의 기둥들이 거의 다 무너지고 그것으로는 오경의 자료(데이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벨하우젠을 공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세 책의 기원에 대한 보수주의의 견해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문서설을 지탱하고 있던 요새들을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그들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인근나라들과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에 그들의 종교적 신조들을 기록으로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이 B.C. 500년 혹은 그 후대까지 그들의 신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믿고자하는 태도이다.

구약개론 - 제8장 오경의 저작권
구약개론 - 제6장 오경 문서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