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목회자료 < 새신자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단계-6(해설)
   글쓴이 :      조회 : 4126    

제6단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5:1 - 15     요절 : 요한복음 5: 8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고질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려 폐인이 되었습니다. 또 깊은 운명주의와 패배주의에 찌들어 살았으나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찾아오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병든 한 영혼을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크신 권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네가 낮고자 하느냐(1-6)?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명절만 되면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양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자비의 집)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길이가 91M, 목이 46M나 되는 상당히 큰 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 가에는 행각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이 행각 속에는 많은 병자들이 즐비하게 누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어떤 병자들이 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혈기 마른 자란 소아마비에 걸렸거나 중풍병에 걸려 수족이 말라비틀어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모두 불치병 환자들입니다. 세상에 좋다는 약은 다 써 보고, 명의라는 의사는 다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허사였습니다. 그들의 병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동안 이들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니는 많아졌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포기하고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데스다 연못에 가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의 분위기는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한숨 소리가 가득합니다.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고 침울합니다. 또 이들은 모두 인생의 패배를 맛본 낙오자입니다. 심한 열등의식과 운명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무기력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곳에 모여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연못의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들이 연못가에 모여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연못이 간헐천이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그곳에 모인 병자들은 그 연못의 물이 동하게 되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물이 동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소망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한계가 무엇입니까?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한 사람만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동하기만 하면 이곳에는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는 마치 대통령 자리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일단 자리를 차지하면 내려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서로 친구가 되어 위로도 합니다. 바둑도 두고 술도 마시며 동병상린의 정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또 환우회 회장도 뽑고, 청소 당번도 정했을 것입니다. 병이 심한 사람을 간호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물이 동하면 바둑을 두던 사람,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 간호해 주던 사람,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한꺼번에 물 속으로 뛰어 들었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의지하고, 동정하고, 위로하던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닙니다. 모두 경쟁의 대상입니다. 상대방을 밀어 내고서라도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에 인간성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딜래마입니다.


 얼마전 범양그룹 회장, 박건식씨의 자살 사건으로 홍역을 치루었습니다. 이분은 자기가 키운 후배에게 배신을 당하여 자살하였습니다. 이들은 서울대학교 선후배 관계입니다. 이들은 서로 아끼며 회사를 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기울고 문제가 심각하게 터지자 인간성의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결국 회장은 ‘한 사장, 인간이 되시오!’라는 유언을 남겨 놓고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선후배가 아니라 친구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장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산 문제나, 근본적인 이해관계에 부딪히면 서로 원수가 되는것는 흔히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은 근복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심이란 타락한 본성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성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피상적인 관계성을 맺을 뿐입니다. 이 이기심 때문에 군중 속에 살면서 무서운 고독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예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 받고 비참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병자가 있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8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 사람의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의 몸에서는 악취가 나고,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때 그는 부자였는데 고질병을 고쳐 보려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렁뱅이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돈이 떨어지자 친구들도 다 떠났습니다. 친척들도 폐인이 되어버린 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남편 구실도 못하는 그를 버려두고 떠나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병자의 누운 것을 관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셨습니다.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었으며, 지금도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며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무슨 질문을 하셨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 낫기 위해 38년 동안이나 애써온 이 병자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런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마음 속에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어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을 고쳐 보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깊은 절망과 체념에 빠졌습니다. 그는 물이 동한다 해도 나을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병이 너무 심하여 다른 사람과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낫고자 하는 소원조차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질문하심으로서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어 주셨습니다. 또 낫고자 하는 소원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고쳐 주실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낫고자 하는 소원만 간절하면 어떤 병이든지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고, 나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없는 자는 고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한번 두번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실패하면 포기해 버립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 버립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이 문제 만큼은 어쩔 수 없구나.” 하면서 제자양성에 거듭 실패한 후 “나는 목사체질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리고 드러누워 있는 분도 있습니다. 또 거듭되는 정욕문제 때문에, 남을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깊이 절망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기독교 운명주의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문제로 인해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아십니다. 그로 인해 영적인 투쟁을 포기하고 깊은 절망과 체념에 빠져 있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우리들의 고질병을 고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자비로운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낫고자 하는 소원만 간절하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키에르케골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주저 앉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네가 진정으로 낫고자 하느냐?”


 Ⅱ. 일어나 걸어가라(7-9)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에 그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의 말을 보면 너무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다 병 낫기 위해 모였는데 누가 38년 된 병자를 못에 넣어 주겠습니까? 이 병자는 다른 병자에게 선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동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이 병자는 자기를 도와 주지 않는 사람들은 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라고 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좀 더 엄밀히 생각해 보면 이 병자가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문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불구자이고, 병이 심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 않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불구자라고 해서 다 이 사람과 같이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불평만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렌 켈러 같은 사람은 보십시오. 그는 이 사람보다 훨씬 더 병이 심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는 절망하거나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절망을 딛이고 위대한 사회사업가가 되었고,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또 저는 기독교 시인 송명희씨의 시를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시는 읽을수록 저의 영혼이 맑게 해주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척추마비로 글자 한자를 쓰려면 온 몸을 비틀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는 비온 뒤의 무지개와 같이 아름답고, 아침 햇살에 찬란히 빛나는 이슬과 같이 영롱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넘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또 어떤 분은 군에서 사고가 나서 목 밑으로 완전히 신경이 마비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이 병자가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은 육신이 병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38년 된 병자가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불평하는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의존심입니다.

 그는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오랫 동안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 의존심이 몸에 배였습니다. 그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오랜 병상생활 동안 남의 동정을 받으려면 엄살을 피워야 한다든지 엄살을 가장 자연스럽게 피우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의 요령을 터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비명도 지르고 뒹굴기도 했을 것입니다. 물이 동하기 전에는 사람들의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또 도와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동하는 순간에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병자는 ‘의리 없는 놈들, 자기밖에 모르는 비열한 놈들’ 하면서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평을 하며 드러누워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비참한 심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의존심이라 인간을 무기력하게 하고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무서운 병입니다.

 요즘 자녀들은 부모님들의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서 인지 의존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지가 멀쩡한데 의존심 때문에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자립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사람을 의지합니다. 목사를 의지하기도 하고, 뭘 기도한다는 기도자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역사가 잘 안 되면 장로가 동역을 잘 못해 주어서라고 불평합니다. 그러면 장로는 목사가 무능해서 그렇다고 불평 합니다. 또 남편을 의지하기도 하고 아내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을 의지하면 상처만 받을 뿐입니다. 사람을 의존하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찾아다니며 피곤하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길에서 넘어져 일어나지 않고 계속 누가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투쟁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절망감에 사로 잡혀 드러 눕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도와 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남편을 원망합니다. 또 불평하고 드러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비참한 심정이 됩니다. 의존심이 강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입만 벌리면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결국 이런 분들은 영적인 중풍병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패배감입니다.

 그는 자기가 내려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 버린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이 병자는 그 동안 물이 동할 때 먼저 내려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젊고 병이 가벼운 사람들이 먼저 뛰어 가 버리기 때문에 그는 옷만 적시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병도 못 낫고 되풀이 되는 동안 이 병자는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무능으로 절망하고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경쟁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병신들만 모인 이 사회에서도 또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더욱 더 무기력해졌습니다. 예컨대 지방 대학생들에게도 이런 패배감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방 대학에 들어 오면서도 또 제 2지망학과에 들어온 분은 더욱 심합니다. 또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에서 실패를 한, 두번 하고 나면 완전히 의욕을 상실해 버립니다. 그러면 휴학을 하고 군대에나 가버립니다. 또 졸업을 해도 취직도 안 될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패배감 때문에 절망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공부할 의욕을 잃고 무기력 하게 드러눕게 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이 병자는 의존심과 패배감으로 심령이 썩어 문드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38년동안이나 고질병을 앓아 온 이 병자에게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병자에게는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심으로 그 병을 고쳐 주시고자 하셨습니까? 자립신앙을 심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걸어 가고자 하는 믿음의 투쟁을 원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마음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해도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도움을 바라는 의존심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걸어 가고자 피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고자 할 때 주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자립적인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했지만 다시 한번 말씀을 붙들고 투쟁할 때 반드시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움직이지도 못하던 그가 어떻게 걸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순종 하고자 투쟁했습니다. 주님께서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순종하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덧입혀 주셨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할 때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도 안된다, 안 될 것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운명적인 인생문제에 도전할 때 주님께서는 위대한 승리를 주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이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절망과 무기력을 극복하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이 말씀은 운명주의와 패배의식에 깊이 찌든 인생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일제 하에서 36년 동안 식민지 통지를 받으면서 온갖 부정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사관을 주입시켰습니다. “한민족은 원래부터 자립심이 없고, 개척정신이 없다. 이조시대의 역사를 봐라. 500년 동안 당파싸움만 하지 않았느냐?” 일본민족은 당파싸움 안합니까?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 지도도 원래는 중국대륙을 향하여 삼킬듯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놈들은 나약한 토끼의 모습과 같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는 노래를 부르면 민족적인 한을 달랬습니다. 요즘도 대학가에는 술이나 마시고 신세타령이나 하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시대가 어렵다고 환경만 탓하고 술이나 마셔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적극적으로 시대문제에 도전하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믿음으로 도전하여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시간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눅5:5).


 Ⅲ .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0-1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 것을 별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양에 대한 사랑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안식 규칙을 어겼다고 정죄하며 문책만 했습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나를 낫게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하더라.” 그는 자기의 병을 고쳐 준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습니다. 그는 자기 병을 낫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리를 들고 걸어 갔습니다. 그래서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면 그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질병을 고쳐 주신 그분에게 모든 책임을 다 돌렸습니다. 12,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 주시고 미리 피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피하지 않으셨다면 이 사람은 즉시 고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육신의 병은 고침을 받았지만 마음에 사람을 의지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의존심은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육신의 병은 고침을 받았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처럼 감사치도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행2:8, 9). 또 소경 거지와 같이 예수님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9:17, 25, 27).


 그후 예수님께서 그를 성전에서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것은 그의 영적인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먼저 이 사람이 어떤 병에서 고침을 받았는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받으바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사람은 아직도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회개하고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고통을 다받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더심한 것이란 장차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의 고통은 38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것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영원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1:8). 예수님은 장차 그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약함을 아시고 회개하도록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쳐 준 자는 예수라고 고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많은 핍박을 받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결론,

병든 인생을 참으시며 겸손히 섬기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람을 찬양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주님께서 이 시간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십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음성을 듣고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일어나 네 자릴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인 자세로 순종하여 운명을 극복하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30 17:31)
도토리는 우리 선조들이 구황식품으로 널리 먹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