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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단계-5(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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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단계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4:1 - 26     요절: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천박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생수를 주신 사건 입니다. 그 여자는 어떤 사람과도 진실한 대화를 나눌수 없는 문제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이 여자를 인내와 겸손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영접하고 솟아나는 샘물을 마실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Ⅰ. 물을 좀 달라 하신 예수님 (1-14)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들을 얻으시고 세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것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주신 것입니다.(2)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 요한의 사역을 능가하자 바리새인들 의 공격의 화살이 예수님께로 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시기 위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마리아를 통해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은 할수만 있으면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로 질러가면 3일이면 갈있는 길을 요단강을 건너 5,6일이나 걸려서 다녔습니다. 9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6,7세기에 걸친 역사적인 배경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원래는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B.C722년경 사마리아가 앗수루에게 멸망될때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포로로 끌려 가고 앗수루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점차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루 사람들이 들어와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들의 신도 섬겼습니다.(왕하 17:33) 그래서 아브라함의 혈통과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임을 믿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상종치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 할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동참하겠다고 제의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 의해 이 제의가 거절되었습니다.(에 4:3) 그래서 더욱 서로의 감정이 상했고, 이방인보다 더 미워하고 멸시했습니다.예수님 당시에는 그 땅을 밟기도 싫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관습을 깨뜨리고 사마리아로 통행하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에 있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수가는 사마리아의 첫성이었으며,그리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유서 깊은 곳이었고 (창48:22), 후에 여호수아가 요셉의 유골을 묻은 곳이었습니다. (수24:32) 이곳은 유대에서 120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야곱의 우물이 동네에서 약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우물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어느 정도 피곤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는 제6시쯤 되었습니다. 6시는 낮 12시로 가장 뜨거운 때입니다. 예수님은 섭시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에 120리나 되는 긴 여행을 하였으므로 몹시 피곤하셨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셨으므로 물도 심히 갈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먹을 곳을 사러 동네로 간 것을 볼때 시장하셨습니다(8).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좌우를 둘러보니 왼쪽에는 축복의 산 그리심산이 있고, 오른쪽에는 에벨산이 줄무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누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가? 7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시원한 아침 저녁으로 물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뜨거운 정오에 혼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것도 동네에서 5리나 떨어진 이곳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눈에 이여자가 문제가 많은 여자요, 목자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18절을 볼때 이 여자는 실제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어떤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과거를 생각해 볼때 참으로 불행한 여자 입니다. 한번의 결혼 실패에도 치료될수 없을만큼 깊은 상처를 받는데 다섯번이나 결혼생활에 실패를 했습니다. 다섯 남편을 거치면서 이 여자가 받은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여자에게 남은 것은 남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불신, 그리고 자기를 멸시하는듯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또한 내면적으로 깊은 운명주의와 열등의식, 그리고 “나같은 년은 죽어야돼” 하며 자학했을 것입니다. 몇번인가 자살을 시도했을도 모릅니다. 이런 분들은 사람들로인해 받은 상처때문에 마음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옆에만 가도 찬 바람이 쌩쌩 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무슨 도움을 요청했습니까? 7절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목이 타서 죽는한이 있더라도 천박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얻어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물을 좀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뼈대 있는 왕족의 혈통을 타고난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요1:1-3)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한없이 낮추시고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겸손히 도움을 요청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물 한모금을 얻어 잡수시기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보는 순간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목자의 심정이 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와 예수님의 마음에는 인간적으로 너무나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은 여리고성과 같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 이 여자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거시고 도움을 요청함으로서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물을 좀 달라”는 이음성은 굳게 닫힌 여자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문밖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노크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러므로 물을 좀 달라고 겸손히 도움을 요청하시는 음성은 죄인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자.

 

 그러나 이 여인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사마리아 여자는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유대인의 한 남자로 생각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는 남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인이요, 또 여자란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여자의 대답 속에는 몇백년 동안 쌓여온 민족적인 감정과 남자들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이 여자는 한 낯선 유대 남자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할수 있는대도 상종할수 없는 요소를 내세우며 관계성을 맺기 싫다고 했습니다. 이때 화를 내고 감정적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다랄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내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리요, 그가 생수를 내게 주었으리라.” 이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여자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시들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렘213, 시36:9)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당시에 ‘생수’라는 말은 고여 있는 물에 대해서 솟아나는 물을 가르켰습니다. 그래서 ‘생수’라는 말에 귀가 번쩌 띄였습니다. 그러나 물을 길을 그릇도 없으면서 생수를 주신다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조상 야곱은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이 여자는 예수님을 야곱과 바교하며 더 위대한 분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자는 야곱 이야기를 꺼냄으로 유대인과 똑같은 야곱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야곱은 인간적으로 매력이 넘치는 남자입니다. 라헬을 연애하여 7년을 수 일같이 여기고 머슴살이 한 집념의 사나이였습니다. (창29:20) 또 그는 근면 성실하여 사기꾼과 같은 라반의 집에서도 거부가 되어 나온 멋진 남자였습니다. (창31:1) 그래서 이 여자는 마음으로 이런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만은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연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야고보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하십니까? 야곱이 주는 물은 마셔도 또 목마릅니다. 야곱의 주는 물은 육신의 목마름을 잠시 채워 줄 뿐입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다시 목 마릅니다. 이 우물물뿐 아닙니다. 야곱과 같은 사람이 주는 열정적인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받아도 목마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는 욕구 불만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는 것은 야곱의 우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과 명예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영혼이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영혼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시켜 주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면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8)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넘칩니다. 이 강물은 켤코 마르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자의 마음속에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14:17) 우리의 카운셀러가 되시며, 때를 따라 지혜를 주시고,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십니다. 또 무한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더이상 인간적인 사랑에 연연해 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것이 넉넉합니다. 만족합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마침내 우리를 연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수가 넘치는 시냇가로 인도 하십니다(계7:17)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생수를 주시기위해 “물을 좀 달라”고 해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몹시 피곤하십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픕니다. 그러나 모든 피곤을 참으며 문제 많은 이 자매님과 기나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상처 투성이가 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시기 위해 모든 아픔을 참으시고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문제 많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문제를 다 아십니다. 얼마나 삶에 지쳐 있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은가도 다 아십니다. 또 얼마나 고독하고 슬픔이 많은가도 아십니다. 또 인간적인 사랑에 목말라하며 괴로와하는가도 아십니다. 기성세대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밥먹여 주고, 공부 시켜 주는데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또 얼마나 밤잠을 못잘 만큼 슬퍼하고 절말하며 번민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모든 괴로움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여러분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짐정으로 도와 주시기 위해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자비로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실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어떻게 생수를 마실수 있게 되었습니까?


Ⅱ . 네 남편을 불러 오라(15-26)

 15절을 보십시오. 이 여자는 예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자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가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번 마시면 연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무더운 정오에 비지땀을 흘리며 물을 기르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마르을 보면 이 여자는 영적으로 목마른 여자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 여자는 물길으는 생활을 지겹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에 지쳐 있는 모습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이 있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면 물을 긷는 생활이 즐거울 것입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상쾌한 아침에 물을 길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그런 기쁨도 사랑하는 남편도 없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지겨운 현실만이 있을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물긷는 생활도 지겨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발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씀은 이 여자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내면에 깊이 응어리 져 있는 이 근본 문제가 해결되히지 않고서는 생수를 마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음이 아프시지만 남편 문제를 끄집어 내어 해결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대개 목사들이 양들을 돕다가 실패하는 이유는 내면에 응어리 져 있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어떤 분은 good mind(좋은 마음) 때문에 감싸 주고 위로만 해주고 손도 못대는 경우도 있습니다.또 어떤 분은 두려워 하다가 놓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율법적인 분들은 양들의 문제를 좀 알고 나서 어찌 그런 일이 있을수 있느냐고 하며 마음에서 판단하는 돕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극복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 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까지 부도덕 할수 있는가?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목자의 심령을 가지고 이 여자의 근본문제를 돕고자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말은 자기의 치부를 가리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릅니다. 이 여자는 남편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자를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말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남편이 없었고 지금 있는 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남편이 다섯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섯번이나 결혼을 했는지 그 자세한 사연은 알 길이 없습니다.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이 여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때 부정한 일로 남편의 버림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남편과 헤어질때 마다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자는 이런 과거와 현재 때문에 스스로 사람들을 멀리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여자의 숨은 운명적인 인생 문제를 드러내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외과 의사가 곪은 상처를 칼로 도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픔이 있더라도 수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검으로 이 여자의 영혼의 곪은 곳을 수술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여자를 만나면 할 수 있는대로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것이 예의 입니다. 이런 문제는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공자님이 여자를 만났다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쯧쯧, 그러니까 내가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긴 담뱃대로 머리를 쳤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은 이 여자에게 “모든것을 잊어 버리고 해탈하라”고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점잖은 충고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이 여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자학에 빠지게 할 것이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다며 운명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시며 이 여자가 자기의 모든 문제를 드러내고 회개 하고 죄사함을 받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결코 우리를 괴롭히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문제가 운명적인 가정 문제일수도 있고, 은밀히 지은 죄 문제 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 이든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시는 주님 안에서 진실하게 내 놓을때 주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자는 예수님을 어떤분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여자는 이제 예수님을 유대인의 한 청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이 여자 사이에는 영적인 목자와 양의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좀 힘들지만 양들의 인생 문제를 믿음으로 도와줄 때 영적인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집니다. 1:1 공부를 여러번 해도 양들이 괴로워하고 있는 근본 문제를 도울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이제 이 여자는 예배 문제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 할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드러난 죄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있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하고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산에서 드려야 한다고 하니 어느 예배가 참 예배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참 예배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참예배란 어떤 예배입니까?

 

 첫째, 참예배는 장소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 할때가 이르리라.”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에서만 예배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전 예배가 폐해졌습니다. (눅23:45) 그러므로 장소에 구애됨 없이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요2:29-21) 그러므로 어디에서든지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수 있습니다.

 

 둘째, 예배의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모세5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고 시편이라든지 선지서나, 역사서 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기나름대로의 하나님을 예배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알지 못하면서 열심히 예배하는 것은 샤머니즘입니다. 요즘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자기 나름대로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이 바로 성장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가 성경에 약속된 분으로 유대인들에게 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세째, 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신령이란 우리의 마음으로 (in spirit)드리는 예배입니다. 진정이란 진리에 기초하여 진실하게(in truth) 드리는 예배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흘려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음에는 죄악이 가득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몸으로 떼우는 예배에 하나님은 진절머리가 나셨다고 했습니다.(사 1:;12-14)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죄악을 회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겠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면서도 메시야가 오시면 자기의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 해 주실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밝히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그제서야 자신이 바로 유대인에서 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니다. 예수님 외에 누가 이 여자의 그리스도가 되실수 있겠습니까? 누가 폐인과 같은 이 여자를 이해해 줄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여자의 주홍같은 붉은 죄를 대신하여 져 줄수 있겠습니까? 세상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이땅에 오셔서 비천한 죄인들을 겸손히 섬기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마리아 여자는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여자는 물동일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 갔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것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넘쳐서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자기의 과거를 다 이야기하며 간증을 했습니다. 이 여자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수치스러운 과거에 더이상 메이지 않고 자유하였습니다. 기쁨이 충만 하였습니다.


 결론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7:37) ” 이 말씀과 같이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고 은혜와 기쁨이 충만케 되었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죄인들을 찾아 오시고 겸손히 물 좀 달라 하신 예수님,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심으로 영생하도록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30 17:31)
도토리는 우리 선조들이 구황식품으로 널리 먹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