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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단계-4(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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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단계 니고데모를 가르치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3 : 1 - 15     요절 : 요한복음 3 : 3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최고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좋은 인간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는 중생을 체험해야 할 타락한 인간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왜 반드시 거듭나야 하며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하는 근본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중생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1 - 8 )

 1절을 보십시요.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 그는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세 개의 종파 중에 하나입니다. 바리새파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생겨난 종파입니다. 당시 세계는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의 헬라문화정책을 힘입어 헬라화 물결 속에 휩쓸렸습니다. 특히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총독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지 못하게 했고 성전에 이방신상을 세우고 돼지머리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헬라신들을 숭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런 유대교 말살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생겨난 종파가 바리새파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페르샤’ 라는 말에서 왔는데 열정적인 사람들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지키는 길만이 유대교의 순수신앙을 지키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오경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지침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미쉬나’ 입니다. 그리고 이 미쉬나를 쉽게 해설해 놓은책이 요즈음 많이 나오는 ‘탈무드’ 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만이 구원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이들의 순수한 열정은 식어 갔고,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율법과 전통, 종교적 형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 Pharisee ) 라는 말은 ‘위선자’ 라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 정식으로 등록된 바리새인들은 약육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유대의 공회원이 된 것을 볼 때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이란 산헤드린의 회원을 가르킵니다. 원래는 “원로원” 이라고 불리웠는데 헤롯 대왕 때부터 “공해” 아 불렀습니다. 이 공회는 7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중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공회는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이스라엘의 최고의 권력기관으로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공회를 “대심판소” 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회원이 되려면 첫째, 귀족 출신이어야 합니다. 둘째, 학문적으로 뛰어나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요.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당시 최고 학문이었던 천문학이나 수사학, 의학, 철학, 역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무엇보다도 모세오경과 성경에 대해서는 정통한 성서학자였음에 틀림 없음니다. 또 19 : 39 을 보십시요.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이나 가지고 온 것을 볼 때 엄청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이요, 사회적으로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모든 인간조건을 다 갖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 라는 이름은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승리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a 절을 보십시요. 그가 왜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족이었고, 공회원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 청년이었으며 성전에 들어와 소란을 피운 상당히 위험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 성전에서 장사군들과 결탁했던 제사장들은 상당히 격분했을 것입니다.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서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찾아 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밤을 택하여 찾아온 것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특히 낮에는 예수님이 항상 많은 무리들 속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1 : 1 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잘 없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을 택하여 예수님을 은밀히 만나서 그의 신앙문제와 시국문제등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니고데모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을 까요? 2b 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 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상당히 높은 칭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표적들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왜 찾아 왔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본 것을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요ㅡ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속히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도 백성의 지도자로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그리스도로서 기대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는 2절에서 ‘우리가’ 라는 대명사를 써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마는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야 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을 아시고 거듭나야 함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 인간이 누리개 되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니고대모의 마음속에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시람들이 볼 때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적으로 정상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학문적으로 성겅한 대 학자요,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다 소유한 자요, 또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으로서 그는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심령을 통치하실 수 없었습니다. ( 롬 10 : 2, 3 ) 이들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엄격히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 빌 3 : 5, 6 ) 그러나 그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으며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 롬 3 : 28 ) 니고데모 역시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 지려고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고 더욱 더 죄악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에 지쳐 깊은 절망과 탄식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 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니고데모의 근본문제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아무리 인간조건이 좋고, 종교적인 열심이 있어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행복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에 쪼들린 사람은 좋은 직장만 얻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예쁜 아내나, 핸섬한 남편을 만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명예심이 강한 사람은 박사학위를 받고, 권세를 잡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파랑새와 같아서 잡힐듯 잡힐듯 하면서 잡히지 않습니다. 또 잡은 그 순간에 이미 행복은 사라집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씨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자살했습니다. 작가 지망생들은 노벨문학상이 최고의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클수록 그 후에 오는 허무도 큽니다. 신입생들은 대학이라는 꿈을 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보면 모든 것이 허무하기만 합니다. 꿈이 컸던 사람일수록 허무도 큰 것입니다. 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절에가서 불공을 드리고 열심히 염불을 외웁니다. 또 어떤 분은 야학을 하며 불우한 청소년들을 돕기도 합니다. 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봉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외적인 인간조건이나 인간의 선행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거듭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거듭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거듭난다는 말은 어원적으로 ‘근본적으로 난다’ ‘위로부터 난다’ ‘새롭게 난다’ 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거듭난다는 말은 타락한 안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로서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학술적인 용어로는 regeneration (재창조) 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서 타락하여 (degeneration)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 렘 17 : 9 )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에는 온갖 음란, 거짓, 교만, 약독, 탐욕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 막 7 : 21, 23 )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악을 행하고 마는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발견하고 “야,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까? ”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 롬 7 : 24 ) 이런 타락한 본성으로는 하나님 나라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세상학문과 합리적인 생각에 굳어져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물이란 씻어서 깨끗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엡 5 : 26 )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도 죄 씻음을 받게 하는 회계의 표시로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씻음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 행 2 : 38 ) 성령께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름과 같이 중생의 도리를 설명합니다. 디도서 3 : 5 - 7 을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 벧전 1 : 22, 23 )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타락한 본성이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면 하나님 나라에 둘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물론 장차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썩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게 되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산소망 (living hope) 을 간직하게 됩니다. ( 벧전 1 : 3, 4 ) 그러므로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어 집니다. 지금까지 간직해온 물질적인 가치관이 영적인 가치관으로 바뀌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더 중요시 하게 됩니다. 또 육적인 삶보다 영적인 삶에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거듭나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이 새롭게 보입니다. 과거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쳐 보이던 나무 한 그루,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도 다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또 저주스럽던 자기 자신이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운명적인 자신의 인간조건이 상처가 되지 않고 오히려 감사조건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현재 소유하며, 장차 들어가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노니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 육으로 난 것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말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모든 것이 바로 육입니다. 우리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 영적인 죽음을 선고 받았습니다.그러므로 인간은 육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육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데 무익합니다. ( 요 6 : 63 )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한 사람은 육에 불과하며,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니고데모도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격은 고상하고 학문적으로 빼어난 학자요, 지성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때 그는 영적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격을 수양하든지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 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며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거듭난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해 주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바람이라는 말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성령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이것을 볼 때 바람과 성령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시간과 장소를 임의로 정합니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성령께도 독립된 인격체로서 임의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 소리를 듣고 우리는 그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Ⅱ. 믿음과 영생 ( 9 - 15 )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해할 수 있는데까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책망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찌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구약성경에 정통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도 성령의 역사나 물로 깨끗게 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삼상 10 : 10, 신 30 : 3, 겔 36 : 26, 27, 시 19 : 7 )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늬 말씀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도리를 받아들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신앙생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특히 바리새인으로서의 의를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요즘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거나 모태신앙자는 중생을 체험하지 못한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이분들은 중생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설명을 해 주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영적 무지를 시인하기 싫어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며 말씀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니고데모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어떤 분은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은혜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분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니고데모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니고데모가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증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11, 12 절을 보십시오.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니고데모의 근본문제는 마음의 지적 교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증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씀하시고 본 것을 증거하십니다. 에수님은 참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요. “ 하늘에서 내려 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에서 내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결코 거짓말이나 거짓증거를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모든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시고 자기 형편이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둘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시면 모든 사람은 죄인인 것입니다. 거듭나야 한다고 하시면 그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다고 하시면 그대로 믿고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론을 펴려고 하기보다 예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하시고 본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거짓을 말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일때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들의 마음을 감화시키사 새사람으로 빚어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 어찌, 어떻게 ’ 라는 말을 되풀이 하는 자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둘째, 인자를 믿어야 합니다. ( 14, 15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믿음과 구원의 도리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사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 거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 민 21 : 1 - 9 ) 이 말씀은 니고데모도 잘알고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돔 광야에서 길이 멀고 험하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은혜를 멸시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보시고 몹시 진노하사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구원의 비밀을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백성에게 그 장대를 쳐다 보는 자는 살려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구원의 방법은 희한 합니다. 독사에게 물려 온 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살아나겠습니까? 니고데모와 같이 ‘ 어찌, 어떻게? ’ 라는 감탄사를 연발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믿고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보면 하나님이 살려 주십니다. 이해가 안갔지만 믿고 순종한 자들을 거짓말같이 살아났습니다.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또 들리신다는 말은 십자가에 죽으실 뿐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을 모두 다 포함합니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들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요. “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자기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피흘려 죽으신 사실을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는 신비입니다. 마치 뱀의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어 가던 사람이 놋뱀을 쳐다 보았을 때 독이 사라지고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죄의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우리 인가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이 죄 문제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노력과 선행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죄의 삯이나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 롬 6 : 23 ) 저도 니고데모와 같이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요, 또 나름대로의 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성실과 노력으로, 또 착한 사람이 되어서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치 아니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 롬 4 : 5 )


 결론

 우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고 죄를 깊이 깨달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때 성령을 선물로 주사 우리의 타락한 심령을 변화시켜 주시고 새사람 되개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30 17:31)
도토리는 우리 선조들이 구황식품으로 널리 먹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