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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단계-2(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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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지난 1강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창조된 필연적인 존재요,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신 창조의 꽃봉오리와 같은 존재임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제 2강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동역자를 주신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4-7)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저자는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중심으로 천지 창조의 대사역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인간창조에 촛점을 맞추어 다시 한번 창조의 대략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특히 1:27, 28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말씀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장에서 특기할 사항을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Jehovah)란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에서 나온 이름으로(출 3:14)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뜻 입니다(계1:8). 그래서 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격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2장 말씀을 공부할 때 창조의 순서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전 땅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 올라와 온지면을 적셨더라”(4,5)

 여기에서 초목이 아직 없었다는 말과 채소가 나지 않았다는 말은 창조되지 않았나는 말입니다. 사람이 경작해야 할 들판과 밭에 사람이 가꾸지 않고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 하셨다는 말씀은 오늘날 창조과학회 학자들의 연구로 증명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노아 홍수 전에는 비가 내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궁창위에 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물이 필타역할을 해서 뜨거운 태양을 걸러서 식물이 잘 자라도록 온도조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안개와 밤이 되면 지면을 촉촉히 적셔서 식물이 자라기에 합당한 수분을 공급했다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수목이 자라고, 채소를 가꿀 수있는 모든 환경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경작할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과 밭은 황량할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역사창조의 주인공인 인간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자연의 모습니다. 인간이 없을 때 자연은 언제까지나 거칠고 메마를 뿐입니다. 여기에 인간창조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토기쟁이가 아름다운 토기를 만들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정성과 사랑을 쏟으셔서 손수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breath of life)란 생명의 기운을 말합니다. 흙이 물질적 요소라면 생기란 비물질적인 요소, 곧 정신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요소는 짐승에게도 있습니다(7:22).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령이란 “human being” 또한 “a living soul” 곧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세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란 히브리말로(ADAM)아담입니다. 아담이란 ‘흙’(ADAMAH)이란 아람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 바울도 첫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고전15:47). 또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전3:20). 마치 토기그릇이 그 수명이 다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십니다. 그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진토와 같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시103:113, 14). 그리고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역하16:9상).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육체의 약함을 깨달았을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렸다고 고백합니다(고후12:9). 그리고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빌4:13).


 둘째, 사람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인간은 흙으로만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살아있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혼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지적, 영적인 속성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과 영,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삼분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통적인 학설로서는 이분설(육체와 영혼)입니다. 그러나 공통적 사실은 인간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칼빈은 영혼을 불멸의 본질이요, 인간의 고귀한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육체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전3:20).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전12:7).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실 때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또 영혼을 인간의 고귀한 인격과 양심과 재능과 하나님의 형상의 본래 자리잡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란 나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둘 다 건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체가 병들면 육체적인 고통이 오기 때문에 빨리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은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병들고, 썩어 문드러져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할 때 소생합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깨어지면 우리의 영혼은 시들고 결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했습니다(고후7:1). 우리 주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4:4). 왜냐하면 우리는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인입니다. 빼어난 음악가요, 위대한 장군이요,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짓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86:4)”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병든 저와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원해주셨습니다(벧전1: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의 영혼의 목자요, 감독자가 되셨습니다(벧전2:25).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혼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히13:17). 그러므로 우리는 병든영혼을 진리의 말씀으로 치료하고, 이들을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게성을 맺도록 도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영혼의 만족이 없습니다. 또 영혼이 죄로 인하여 깊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하나님이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육신적으로 편하고, 만족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술과 미팅, 고팅을 즐깁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그 영혼은 목 마르고, 곤핍하여질 뿐입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씨는 ‘설국’을 쓰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후 그는 자살했습니다. 그는 그 영혼의 공허함을 메꿀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도 육신의 만족을 위하여 여섯 남편을 가졌었지만 행복이 없었고, 그 영혼은 더욱 갈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는 영원이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셨습니다(요4:14).


다같이 요한복음 7:37, 38 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째, 생명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된 것이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존재가 결코 박테리아나 아메바에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이 살아 있는 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이 내 코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욥33:4).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내 코에 생기를 거두어 가시고, 내 영혼을 찾아 가시면 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2:16-21에 보면 재미있는 예수님의 예화가 나옵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비유입니다. 그는 열심히 지어 곡간에 곡식을 잔뜩 쌓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였습니다. 그 곡간을 헐고 더 큰 곡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곡물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를 위해서 쓸 것을 쌓아 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이 고귀한 생명을 무엇을 위하여 써야 하겠습니까?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써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육신의 쾌락을 위해 써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써야 겠습니까? 아닙니다. 썩지않는 양식을 위해서, 불멸의 가치를 위해 써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합니다. 생명은 내것도 아니고, 내 부모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다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찾으실 때 하나님께로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도로 찾으실 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 몸으로 행한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고후5:10) 그러므로 생명을 학대하거나 함부로 죄 짖는데 써서는 안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하여 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계2:10)


Ⅱ.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8-17)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위해서 에덴에 동산을 창조하셨고, 거룩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1. 에덴동상을 창설하신 하나님(8-15)

8절을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Eden)이란 낙원(Paradise) 곧 최대의 즐거움과 행복이 있는 곳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동산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산에는 각종 아름다은 나무들이 피어 났습니다. 벌, 나비들이 춤을 추며 이꽃 저꽃 사이로 날아 다닙니다. 또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따 먹을수 있는 아름다운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도 나게 하셨습니다. 또 보시기에 좋은 이름다운 나무들이 나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가꾸신 동산이니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 하겠습니까? 이곳은 최고의 예술이 있고, 빈곤이 없는 곳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영혼에 만족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만드신 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아담에게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약속하신 언약의 징표로 주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아담의 마음속에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알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하는 지식을 갖게하는 나무였습니다. 이 두 나무는 아담의 영적생활에 지침이 되는 영혼의 양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볼 때 낙원이란 진정한 영혼의 만족이 있는 곳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10-14절을 보시면 그곳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습니다. 첫째강은 비손입니다. 둘째강은 기혼입니다. 세째강은 힛데겔 곧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는 티그리스강 입니다. 네째강은 유브라데스강 입니다. 그리고 그 강주위의 환경도 아름답습니다. 하윌라 온땅을 둘러 흘러가는 강가에는 황금과 온갖 보석들이 가득했습니다. 강이란 고데 사회에서 인류의 생명의 젖줄과 같이 중요합니다. 특히 땅속에서 샘물이 솟아난 에덴동산을 넉넉히 적시고, 그후 네강의 근원이 되어 흘러 갔습니다. 이를 볼 때 에덴 동산이 사시사철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모든 것들이 풍족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하나님은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지 다 공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까와 하시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것을 내어 주시는 어머니와 같이 아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일4:8)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롬8:32)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인류를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낙원을 예비하셨습니다.


다같이 계시록 22:1-5절을 보십시오.

에덴에 강이 흘러 동산을 적시고. 온 세상에 흘러 나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로 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길가로 흐릅니다. 길가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사시사철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며 만백성을 소생시켜 줍니다. 또 그곳에는 온갖 아름다운 보석들로 단장되어 있습니다.(계21:19) 그리고 그곳에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없고 영원한 즐거움과 찬양이 있는 곳입니다.(계21:4) 비천한 죄인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영원한 낙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16, 17)

하나님은 낙원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낙원에 들어 오면서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한한 축복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영적 비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계명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스 바이블(Adam s Bible)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17절에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그 명령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부사구 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이 지켜도 좋고, 안지켜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명령을 지킬 때 아담은 영원히 살고, 이 명령을 어길 때 아담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을 만드시고, 절대적인 명령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영적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 크신 권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인간을 자기 형상데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인간을 위해서 그 모든 축복을 다 주셨습니다. 16절 상반절에 있는대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따 먹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바나나 먹고 싶으면 바나나 먹고, 파인애플 먹고 싶으면 마음껏 따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열매를 인간에게 주기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무한한 자유와 축복에 빠져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명령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분명한 영적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아무리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여도 피조물이라는 테두리를 근본적으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 질서를 파괴할 때 이미 모든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할 때 어떻게 되니까?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롬1:21-23)

 이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가 자유를 남용하여, 기고만장하게 땅으로 올라 온다면 스스로 파멸을 초래 할 뿐입니다. 자유란 자기 분수를 알고, 분명한 질서 속에서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그렇게 된것 처럼 교만하여 지고 창조주 하나남을 부인하게 된다면 인간은 물에서 나온 물고기와 같이 죽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방종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의 말씀을 순종할 때 계속적으로 에덴동산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산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아담이 눈만 뜨면 그 나무를 볼 때 마다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도록 도와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동물을 식물로 주시면서 한가지 피를 먹는 것을 금 하셨습니다.(9:3-5) 피가 아까와서가 아닙니다. 피는 생명이요,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금하신 것은 영적인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질서를 지킬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주일 중에 안식일을 특별하신 것도 일주일이 다 인간에게 주어 졌지만 그 하루는 하나님의 날로 구별하심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의 첫자리에 모시도록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마음으로 순종하고 지킬 때 우리는 기쁨으로 신앙 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를 파괴 할때 이미 마음의 질서가 파괴되고, 영적인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한 가정이 유지되려면 질서가 필요 합니다. 이 질서는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인격적인 순종을 원하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여기서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선이요,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 나무는 선악의 절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선악과를 먹을 경우 어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먹지않을 때 어떤 축복이 주어질 것인가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 위험을 경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심으로서 악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경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아담은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악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나무를 두시고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자유의지와 인격을 존중히 여기시며, 그 마음에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율적이고 인격적인 순종을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 이십니다. 그래서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 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란,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가 있고, 불순종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시부터 이 가능성ㅇ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동물과 같이 만드실 수도 없습니다. 또 기계와 같이 만드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겨도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섬기지 않고,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빠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하사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네가 나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 하셨습니다.(요21:15-17)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의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한 것도 자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분은 자율적인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면 안일하게 적당하게 섬겨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을 피흘려 죽게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리라 믿습니다.

 

 이 시간으로 부터는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창조질서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기를 기드 드립니다.


 Ⅲ .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18-25)

 하나님은 아담에게 낙원을 주시고 신령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돕는 배필이란 아담의 성품과 신분이 같은 존재로서 아담의 일을 거들어 줄 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때 아담은 돕는 배필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제 동역자를 주셨습니까? 19,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들짐승과 각종 새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열심히 각 생물들의 특징을 찾아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때 돕는 배필이 없었으므로 아담에게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열심히 사명을 감당할 때 배필을 허락 하셨습니다. 또한 동역자를 주신 목적이 아담으로 하여금 더욱더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두 사람의 힘과 지혜를 다 합하여 사명을 완수 하도록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큰 소리를 잘 치지만 섬세하지 못합니다. 용감하지만 자상하지 못합니다. 또 여성들은 연약한듯 보이지만 강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약점을 감싸주고, 서로의 장점을 살려서 합심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대개 형제들은 자매들이 어떻게 동역해 주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을 수가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남성이지만 남자를 정복하는 것은 여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여성들은 연약한것 같지만 남성들에 대해서는 강합니다. 이것을 총각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불신자 아가씨와 결혼해서 변화시키면 되지않느냐 합니다. 이것은 교만에서 나온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러므로 남성들은 믿음있는 여성을 돕는 배필로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사역도 믿음있는 동역자가 있는 교회가 꾸준히 성장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고, 형제들의 사랑이나 받으려 하는 자가 있는 교회는 성장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동역자가 되려면 남자보자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역자를 만들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여자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 했습니다.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칭하리라”


 아담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여자를 아내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그 심령에서 사랑이 솟아났으며, 가장 깊은 사랑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아담의 이 사랑고백은 단순히 연애 감정에서 나온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여자를 아내로 영접하였을 때 나오는 사랑 입니다. 이 사랑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속적인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머리뼈나 발가락 뼈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만하지도, 무시당하지도 않는 일생의 동반자로 만드시기 위해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또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인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힘써 일하는 남자의 동역자,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남지보다 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잘못된 길로 갈때 붙잡아 주고, 힘이없어 연약할 때 힘과 용기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자립적인 신앙을 가져야 아담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최초의 결혼은 연애결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여 가정을 이루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연애결혼은 창세기 6장에서야 나옵니다. 인간들이 타락한 후에 남자들이 자기들의 보기에 좋은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6:1-2)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가장 모범적 인 결혼은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이삭의 결혼 입니다. 이삭의 결혼은 아담의 결혼과 비슷합니다. 이삭은 결혼 문제를 믿음의 종 아브라함과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에게 완전히 맡겼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데리고 왔을 때 순종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창26:67) 결혼을 하고 사랑을 했습니다. 그는 일부다처주의의 시대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리브가를 사랑하며 평생동안 한 아내만 사랑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두 여자를 창조하셨더면 임부더처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한남자와 한여자가 결혼을 해야 합니다.(말2:15) 또한 믿음의 결혼이란 상대방의 인간조건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울 믿고,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순종하여 결혼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는 골라잡기식의 결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온전히 맡기고 순종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니다” 이 말씀은 성서적 결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첫째, 남자의 자립입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자립하여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둘이 연합하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의 개성괴 능력과 지혜와 모든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연합은 두사람의 신앙, 삶의 방향, 소망, 사명등이 같을 때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육체적인 결합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사명을 갖게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게서는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서적인 결혼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선포 하셨습니다.(마19:5, 6) 결혼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 행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나눌 수 없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가 두사람이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결혼한 아담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결론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다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계명의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30 17:31)
도토리는 우리 선조들이 구황식품으로 널리 먹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