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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신자를 위한 기초성경공부 8단계-7(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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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단계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8:1-12 요절 :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 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구원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 여자는 육신의 자유를 구하다가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는 은밀히 죄의 낙을 즐기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예수님을 고소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여인을 구원해 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빛 되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계속하여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을 덧입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1-9)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초막절이 끝난 후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원수들이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예루살렘에는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들어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에 들어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백성들은 초막절을 마치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침이었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분주하여 말씀을 전할 분위기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에 나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밤이 늦도록 기도하실 때 무엇을 했습니까? 어두운 뒷골목을 수색하며 간음하는 자를 찾아 다녔습니다. 여자가 가음하는 것을 발견하고 현장에서 잘아 끌고 온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5).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레20:10). 또한 결혼한 첫날밤에 신부가 처녀인 표적이 보이지 않아도 돌로쳐 죽이도록 명했습니다(신22:21). 이만큼 하나님께서는 간음죄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엄히 다스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감음죄는 우리 인간사회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가장 큰 원인도 성윤리와 도덕의 파괴 때문입니다. 유부녀가 바람이 나면 가정이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자식들이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또 간음죄는 자기 몸에 짓는 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죄악입니다(고전 6:18, 19).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된 노아시대 사람들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또 호모섹스로 부패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볼로 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후세에 경건치 않는 자들에게 본을 삼으신 것입니다(벧후2:6)


 오늘날 이 간음죄 때문에 이 세상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미국이나 구라파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나라에는 간통죄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내나 남편이 고소가 없으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또 미국 L. A 에는 두 쌍이 결혼하면 1쌍은 이혼을 합니다. 이것은 합법적인 이혼의 경우이고 실제는 더 많다고 합니다. 이만큼 이 시대는 음란하고 패역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병폐 중의 하나입니다. 민주주의의 근복원리가 다수가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윤리와 도덕까지도 다수가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이혼이 정당화되고, 심지어 동성연애와 결혼까지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된 세상을 20세기의 흑사병이라고 불리우는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치셨습니다.


 그러면 군중 앞에 끌려온 이 여자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여자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욕의 죄는 은밀하게 짓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그 죄가 드러나게 될 때 정말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 수치심 때문에 정욕의 죄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격이 소심하게 되어 내성적이 됩니다. 심하면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또 이 여자는 간음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욕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끌려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공중 앞에서 돌에 맞아 죽을 고통을 생각하며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 앞에 끌려온 이 여자를 볼 때 아무리 은밀하게 지은 죄라 할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되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도 재수없게 걸려서 죽게 되었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삼하12:12). 이 땅에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장으로 오시는 그날에는 은밀한 것까지도 다 심판하십니다(롬2:16 ).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몸의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죄란 순간적인 쾌락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한 파멸입니다. 구약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계 21:8). 이땅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형별은 장차 받을 영원한 형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를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죄를 무서워 해야 합니다. 죄는 그림자라도 밟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체적인 순결 뿐만아니라 마음의 순결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이 여자를 끌고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4, 5 절을 보십시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늘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를 시험함 이었습니다(6) 예수님을 송사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 가련한 여자를 미끼로 이용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질문이 어떻게 예수님께 시험이 됩니까? 돌로 치라고 하면 사형집행을 금지한 로마법을 어기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법에 고소하여 처형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영접해 주시고, 죄를 사해 주신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고 하면 지금까지 가르치신 모든 사랑의 진리가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또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계명을 정면으로 이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모세를 대적한 자라고 몰아부쳐 체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 놓을 명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치라고도 치지 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무서운 죄악을 도모하면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여기서 썼다는 말은 ‘대항하셨다’ 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십계명을 썼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면 너 자신을 알라고 썼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글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글을 쓰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몹시 분개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참으시며 이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면 이 불쌍한 여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또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시고 간절히 기도하시며 마음의 여유를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이 말씀에는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두 가지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돌로 치라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여자의 죄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할 만큼 심각한 죄인임을 시인하셨습니다. 에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려 왔다고 해서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모세보다 더욱 엄격하십니다.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고 명했으니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으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정죄하셨습니다(마 5: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패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엄격히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죄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 여자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둘째,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여기서 죄 없는 자란 ‘죄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라는 뜻으로 행위로 지은 죄 뿐 아니라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돌로 치기전에 먼저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셨습니다. 과연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일만큼 자신에게는 죄가 전혀 없는가를 살펴보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남을 열심히 판단하다가도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의 눈에 티만 보고 자기 눈 속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은 죄가 없는지 돌아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8).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도록 시간적인 여유를 주셨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그 가운데 예수만 남았더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이 여자를 이용하여 죄 없는 예수를 죽이려 하는 죄악된 자신을 생각하니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간을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롭고 경건합니다. 율법도 엄격하게 지킵니다. 겉으로 볼 때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말을 하니 죄가 전혀 없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추악한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의인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3:10). 그러므로 죄있는 인간이 죄인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똥 묻는 개가 등겨 묻는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눈 속에 있는 돌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하는 자를 하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인간문제에 시달리는 분들을 보면 안타가운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분들은 자기 의가 많습니다. 사랑이 없고 이기적입니다. 끊임없이 남에게 선을 강요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무시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대로 자기도 판단을 받습니다. 그런 자기를 또 판단하고 괴로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남에게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판단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회개할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놀랍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주는대로 돌아옵니다. 남에게 긍휼을 베풀면 긍휼이 돌아오고 사랑을 배풀면 사랑이 돌아옵니다. 남을 칭찬하면 칭찬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면 판단 받습니다. 무시하면 무시함을 받습니다. 돌이 던지면 돌이 날아옵니다. 우리 속담에도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더욱 험악해집니다. 특히 주님의 종들은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섬기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마음으로는 한 생명도 살릴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약속을 계속 어기고 순종치 않는 양을 판단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와 합니다. 또 양들의 허물과 약점이 드러나면 “어찌 저럴 수 있는가?” 하면 속으로 돌을 던집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성도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돌을 던지지 않고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정죄치 않으시는 예수님(10-12)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일어나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이 여자는 “주여! 없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여자를 정죄하던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이제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받으신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어떻게 재판하셨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이 여자가 마땅히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죄인이지만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을 보면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한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몸을 잆으시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심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깊이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연약한 존재인가를 깊이 아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끌려 들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하시지 않으시고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3: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죄악을 그 몸에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여자의 죄를 눈과 같이 회게 도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지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할 수밖에 없는 자들임을 깊이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9절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과거에 우리가 지은 죄를 문책할 수 없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 34).”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죄악에 얽매여 인생을 슬프게 살아서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든지 우리의 연약함을 진실하게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게에 도말해 주십니다. 특히 정욕죄는 끈질지게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반복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또 반복합니다. 이때 사단을 재빨리 찾아와 불신을 심고,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송사합니다. 이 때 우리는 더욱 더 십자가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아뢰고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더욱 깊이 영접해야 합니다. 가끔 저는 예수님의 용서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죄하며 괴로와 하는 분들을 봅니다. 이분들은 한숨은 푹푹 쉬며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해!” 하며 자학합니다. 이것은 남을 정죄하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멸시하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정죄를 받으셨는데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무슨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을 이 여자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잡아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이 여자는 죄의 쾌락을 즐기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죄와 싸우는 삶을 살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을 자기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하여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겨서 안됩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죄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할때 더욱 많은 유혹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투쟁하며 죄와 싸우고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이시간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참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자유케 하리라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34). 그리고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35).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여자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초막절 마지막날에 특히 강조되는 두 가지 행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지난 강의에서 공부한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다 제단에 붓는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등불놀이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다 아주 크고 밝은 등불을 4개를 달아 놓고 그 밑에서 사두개인 등, 종교지도자들이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밀반백성들은 빙 돌러 앉아서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이 행사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빛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밤마다 불기둥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광야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사입니다. 장막절 마지막 날은 등을 환하게 켜놓고 새벽 닭이 올 때까지 춤을 추며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행사를 보시면서 나는 세상의 빛이시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으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게 되었습니다(마4:16).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죽게 된 이 여자에계 예수님은 구원의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 뿐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고통하는 모든 인생들의 구원의 빛이 되십니다. 38년 동안 변마에 시달리던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능력의 빛이 되셨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거지에게도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소망없이 고기나 잡으며 살던 베드로에게 에수님은 희망의 빛이 되셨고, 이기적인 욕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던 세리 마태에게도 예수님은 사랑의 빛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따른다는 말을 무슨 뜻입니까? 따른다는 말은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의 자세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을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갈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위하여 빛되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날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따르는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생애들 본받고, 그분의 형상을 덧입는 제자로서의 삶 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결코 어둠에 다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이 서게 됩니다. 어두운 마음에 생명의 빛이 비췹니다. 시들은 인생들도 빛되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싱싱하게살아납니다.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던 사람도 감사와 기쁨이 충만케 됩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자유를 누리려면 참 빛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겸손히 배우며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결론.

 육신적인 자유가 참 자유가 아닙니다. 육신의 자유는 오히려 죄의 종이 되게 할 뿐입니다. 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바리새인들 같이 율법을 엄격히 지킨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로 부터 참으로 자유케 하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이 예수님을 만나고 참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바이블넷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3-30 17:31)
도토리는 우리 선조들이 구황식품으로 널리 먹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