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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겸손 Humility(앤드류머레이)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6156    

[ 제 1 장 ]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 4: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오직 하나였는데, 그것은 즉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동참케 하는 동시에, 그의 축복에 참여케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그들을 통해 나타내려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피조물은 존재의 근원과 시작을 돌이켜 보아야 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겸손)을 알아야 한다. 즉 인간에게 있어, 그의 고결한 생각과 높은 덕행과 아울러 참 행복은, 과거에도 또 현재와 영원한 미래에 있어서도 여전히 겸손히 비어진 마음에만 채워지는 것이다.
교만해지거나 혹은 이 겸손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이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 하늘나라나 이 세상 나라를 막론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은 곧 지옥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지옥의 시작이며 동시에 저주이다. 곧 그대에게서 교만이 죽지 않으면 하늘의 것이 그대 속에서 살 수 없다. 교만은 결코 도덕적 결함이 아니며, 겸손은 결코 하나의 인격적 덕성만이 아니다. 전자는 사망이요 후자는 생명이며, 전자는 지옥이요 후자는 천국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는 그 겸손은 그리스도가 천국에서 아버지와 같이 계실 때에도 그를 주장하였던 것이었다. 그 겸손은 그로 하여금 천국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게 했고, 또 그는 그 겸손을 천국에서부터 이 땅에 옮겨오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땅 위에서 그는 자기를 낮추시사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이다. 그의 겸손은 그의 죽으심에 대하여 그 가치를 발휘하게 했고 또한 우리의 구속을 성취케 했다.
만일 이 겸손이 없다면 하나님을 모실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총도, 성령의 힘도 체험할 수가 없다. 겸손은 다른 여러 가지의 은혜나 미덕들 중의 하나이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은혜와 미덕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올바른 태도요, 또한 겸손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행사를 우리에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겸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의 지위를 옳게 똑바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임을 가리킨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관계가 곧 겸손이고, 축복받는 비결이며, 천사들을 그토록 겸허하게 만들고, 예수를 그처럼 낮추셨고, 지극히 거룩한 하늘의 성도를 그렇게 겸허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도록 맡겨버린 것이 바로 겸손이다.
주님의 참 제자의 특성은 마음의 온유와 겸손에 있으며, 또한 겸손이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간구와 기도와 신앙의 훈련의 목표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조용히 나를 돌아보아 교만처럼 뿌리 깊이 우리의 마음 속에 침투되어 있는 것은 없고, 또한 교만처럼 곤란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자!

[ 제 2 장 ] 속죄의 비결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나무는 그 뿌리의 본질대로 자랄 수밖에 없다. 그 나무가 존재해 있는 동안 그 나무는 자기를 이 세상에 나게 했던 그 씨 속에 들어있는 그 생명 그대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조상인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던 그 태초의 행복들은 교만으로 인해 처참히 무너져버렸으며, 그 죄의 독약은 하와로부터 태어난 모든 인류에게 영원히 물려졌다. 이 교만은 전쟁과 이기심, 모든 비참한 현실과 고통을 불러 일으켰고 무엇보다 인간의 내면에 두려움과 죽음의 요소를 심어 넣었다. 사람들은 이 교만을 이기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자기의 깊은 내면에서, 그리고 흑암의 깊은 세력으로부터 오는 이 교만을 대적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물론 이를 심령깊이 깨닫고 온전히 절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바로 겸손으로 교만을 대적하시고 물리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스러운 겸손으로 종의 형상을 입으사 이 땅까지 낮아지셨다. 당신의 겸손으로 십자가에 매어 달리시고 자기를 낮추시며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높이심으로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승천, 찬란한 영광의 면류관 역시 그리스도의 겸손이다. 그리스도의 생의 첫째되는 것은 겸손이었으며, 그의 구속의 비밀은 바로 겸손이었다. 우리가 둘째 아담,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 그의 능력 즉 살아 움직이는 겸손의 영을 우리 마음에 주어 교만을 이기게 하는 그 그리스도의 능력(== 겸손)을 잘 알 때 능히 교만을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악마가 뿌린 교만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강하게 지배한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겸손의 힘은 더욱 우리를 강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겸손하신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자라야 한다. 그리할 때만이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자아(自我)에서 구원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범죄한 성품의 근원은 바로 나(自我)이며 우리의 구원의 가능은 나를 부인하는 데에만 있다. 그러므로 나(自我)를 부인하려는 영적인 투쟁,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겸손을 본받아,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나(自我)라는 우상을 죽여야 한다.(예: 솔직과 정직이라는 구실 아래 비판, 폄론(貶論), 모든 감정과 분노의 표시,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모든 생각들을 드러내는 것도 바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교만이다.)

[ 제 3 장 ] 예수의 생활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7b)

겸손이란, 다시 말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가 되도록 피조물이 승낙을 하는 일이며, 하나님만이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순복시키는 덕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하여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겸손의 진리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늘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5:19).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요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요8:50).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대할 때 언제나 겸손히 대하셨다. 곧 하나님만이 전부이기 위해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역사하시기 위해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셨다. 이러한 전적인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복종은 아버지에게만 의지한 주님의 생활에 있어서 온전한 평안과 기쁨의 근원이 되었으며, 이로써 주님은 무엇을 잃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높이심과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셨다. 즉, 그리스도의 겸손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께서 즐겨하시는 그것을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안에서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이었다.
진정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본질과 성격은, 곧 자기부인(自己否認)과 자아(自我)란 단지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는 빈 전(殿)으로서만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자아가 주장하는 모든 소욕과 행위는 잠시 잠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올바로 알고 또 알고자 해야 한다. 주님도 이 진리를 아셨기에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기를 낮추셨고, 또한 사람 앞에서도 항상 섬기는 종으로 낮아질 수 있으셨다.
그러면 진정한 겸손이란 어디서 생기며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또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아는 그 지식, 또 우리들 자신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확실히 아는 그 지식에서 진정한 겸손과 그 힘은 생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순간 순간 하나님의 감추인 크신 섭리들을 알아나가야 한다. 우리가 주님처럼, 우리의 전 생애를 겸손으로 일관하여 오직 우리를 통해 하나님만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다.

[ 제 4 장 ] 예수의 교훈에서 보는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11:29a)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7)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겸손을 배울 수 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3,5). 지극히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임한다. 온유한 자,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오히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겸손은 하늘과 땅의 축복을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을 통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배우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무엇을? 바로 온유와 겸손을!!! 이를 통해 온전한 쉼을 누리게 된다.
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하늘 나라에서 으뜸된 자는 겸손한 자이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영광, 참으로 아름다운 것,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겸손이다.
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7).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a). 천국의 가장 귀한 자리는 겸손한 자에게 예비되어 있다. 겸손은 영광의 표준 잣대!
5.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 겸손은 천국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다리다.
6.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눅18:14b). 자기를 낮추는 길이 자기를 높이는 유일한 길이다. 오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참된 겸손으로 충만할 때만이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고 받으신다.
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8.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b). 제일 큰 자는 섬기는 자이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서로의 종이 되어라”. 참된 종은 주인에게 헌신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살피며 근신하고, 주인의 번영과 존귀와 행복을 기뻐한다. 우리가 서로의 종이 되기를 원하고 서로의 종 되기를 기뻐하자.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이들일수록 더욱 섬기고 그의 종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하자. 이는 천국의 기쁨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하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 원하고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원한다면, 더욱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를 힘쓰라. 언제나 겸손하기를 힘쓰고 종의 자리 외에는 구하지 말라. 종의 자리를 잡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요 기도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자에게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부으셔서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 제 5 장 ]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본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22:26)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버렸다. 그들이 가진 모든 재산, 가족, 삶,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죽을 각오로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이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계명도 열심히 지켰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면에는 교만이라는 무서운 흑암의 권세가 깃들이고 있었다. 태초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죄악된 본성은 어쩌다 가끔씩 예수님의 권세에 눌려 겸손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결국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지배하였다. 이 어둠 권세는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끊어져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으뜸되고 가장 높은 은사(==겸손)는 제자들의 힘으로는 이룰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겸손이란, 우리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여 우리가 우리 속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게 될 때 비로소 권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수많은 교훈을 배우고 또 인간적으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들에게서 진정한 겸손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하셨건만 결국 제자들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조차 서로 누가 큰 지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이, 곧 그의 겸손이 우리의 새성품이 되어 우리의 옛 성품을 부수고 힘있게 나타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세력으로 교만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것은 교만보다 더 강한 사단의 세력에 지배받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참 겸손이란 그 겸손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자기의 열심과 의로써는 결코 이룰 수 없다. 교만해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쉬운 것처럼 겸손해지는 것도 자연스럽고 쉽게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에 임하시고 흑암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하다. 우리의 내면에 이 겸손이 부족함을 깨닫고 심령으로 회개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충만케 해야 하겠다.

[ 제 6 장 ] 일상 생활에서의 겸손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b)

일상 생활은 우리의 내면을 시험하는 시험장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겸손할 수 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을 묵상할 때 누구든지 일시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겸손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로 그 겸손이 우리의 본 성품이 되었다면 그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통 생활 속에서, 다른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 속에서 표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부주의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생활, 바로 그 때조차도 겸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4장에서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겸손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이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겸손을 행하심으로 가르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들과, 그것도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과 함께 만찬을 드신 일, 더럽고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일, 아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도 바울 또한 서신서를 통해 주님의 겸손을 드러내셨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 “서로 종이 되라”(갈), “서로 용납하고 … 그리스도의 두려움 안에서 서로 순복하라”(엡),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옷입고”(골).
‘하지만, 지혜나 능력이나 신령한 은혜에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못난 사람을 어떻게 낫게 여길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겸손이란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 자신의 전부가 되시는 것,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종으로 여기는 것이다. 종이 주인보다 더 뛰어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신실한 종은 어리석은 주인 앞에서도 언제나 종으로서의 정신과 태도를 잃지 않는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볼 것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오히려 우러러보며 존경하고 섬긴다. 동역자들의 수많은 실수와 허물 앞에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인내와 용서로 우리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용서로 동역자를 용서하고 품어줄 수 있다. 즉, 그 마음까지 겸손한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자임을 기뻐하고,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동역자들을 섬겨주고 위로해 주는 것을 기뻐하자. 우리 마음을 겸손으로 가득 채워, 모든 사람을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대하자. 서로 사랑하고 섬겨주자.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에게도 원하시기 때문이다.

[ 제 7 장 ] 겸손과 성결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사65:5a)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그 성품이 임재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우리의 내면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이 없는 성결은 위선일 뿐이며 지독한 교만이다. 따라서 겸손은 성결의 시금석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다 알 것이다. 누가 보나 바리새인이 더 성결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의 교만으로 성결을 더럽혔을 뿐이다. 오히려 통회함과 자복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세리를 하나님은 의롭게 여기시고 그를 더욱 성결한 자로 인정하셨다. 그러나 세리도 그 후에 자기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찬양하려하는 그 교만을 날카롭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의롭다 인정 받은 자는 스스로 의롭다 인정하려는 마음을 수시로 check하고 회개해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아니한 그 사실이 바로 신앙 생활하는 우리의 특권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세상 사람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인정해 주지도 않으신다. 언제나 세리처럼 겸손한 자, 주님의 성품으로 옷입은 자에게 그 성결을 더하신다. 우리가 외모는 세리와 같지만 내면은 바리새인과 같은 자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내면을 주의깊게 살펴야 하겠다. 내가 영적인 성장을 거듭할지라도 그런 자신을 사람들과 비교하는 교만을 행하지 말아야 하겠다.

[ 제 8 장 ] 겸손과 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c)

겸손과 죄는 본질상 연관이 없다. 겸손은 뉘우쳐 회개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인이라는 자각은 그 내면을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거의 그의 죄악들을 기억지 아니하셨지만 그는 결코 큰 죄를 범한 자신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면 풍성할수록, 그 감격과 기쁨이 크면 클수록 바울은 더더욱 구원함을 얻은 죄인임을 깊이 느꼈다. 또 그럴수록 더욱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으면 살지 못하였을 중죄인(重罪人)임을 깊이 자각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하게 될 수 있다. 이는 일상적인 범죄하고는 다르다. 이는 아직도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겸손한 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의 잠재세력을 잘 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세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때문에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자 한다. 성령께서 그의 몸의 행실을 죽이심으로 신앙 생활에서 승리하게 도우시기를 간절히 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죄는 결코 사람을 겸손케 하지 못한다. 오히려 완악하게 하고 교만하게 하며 그 결과는 더욱 추한 죄일 뿐이다. 다만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죄의식이 그 내면을 겸비케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게 하는 것이다.

[ 제 9 장 ] 겸손과 신앙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5:44)

신앙 생활의 축복은 유리 진열장 안에 진열된 상품들과 같다. 우리로 하여금 그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는 유리같은 존재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교만의 세력이다. 주님께서는 요5:44 말씀을 통해 교만이 신앙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과 신앙은 본질상 동일한 것이다.
신앙은,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전혀 무가치한 것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이다. 겸손은 단순히 사람의 심령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만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서로서로 사람의 영광과 존귀와 명예를 추구하고 사랑하며 열심히 보존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우리의 옛 사람, 우리의 자아가 온전히 죽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끝없이 낮추신 그 십자가와 죽으심, 무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누리셨다.
또한 믿음과 겸손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복음서를 볼 때 주님께서 칭찬하신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대부분 주님 앞에서 자신이 한 없이 낮아지는 지극한 겸손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종의 치료를 부탁한 백부장이 그러했고, 자기 딸의 병을 고침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러했다. 특히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자신이 개로 여김을 당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말로는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 하지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조차 고개를 꼿꼿이 세우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보다 더 깊고 충만한 은혜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겸손하면 할수록 우리와 더욱 더 가까이서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 제 10 장 ] 겸손과 자아(自我)에 대한 죽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2:8)

겸손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없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의 뜻을 완전히 죽여 버렸다는 그 사실을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증명하셨다.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쓴 잔을 받으시고 우리의 주님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셨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이 가지는 모든 연약한 인성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신 것이다.
우리도 죽기까지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이것만이 참 겸손을 소유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자아를 죽이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리 악바리 투쟁을 해도 불가능하다. 자기를 죽이는 유일한 참된 길은 인내와 온유와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길 뿐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내와 온유와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자기를 버리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로써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셨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길이요 우리 내면에 신앙인으로서의 축복을 얻는 방법이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음까지 내려가는 뿌리 깊은 겸손을 덧입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께서 계시는 하늘에까지 우리가 높아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 제 11 장 ] 겸손과 행복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b)

인간의 행복은 겸손에 달려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환경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그 내면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평강과 안식과 기쁨을 주신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모든 것을 주신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 큰 부르짖음의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가시가 바울에게 있어 축복임을 깊이 가르쳐 주심으로 그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셨다. 바울에게 있어 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가시가 없었던 때보다 더욱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였다. 바울은 그 가시로 인하여 고통보다도 겸손을 받아들인 것이다. 겸비의 자리, 바로 그 자체가 축복의 자리요 능력과 기쁨과 행복의 자리인 것을 바울은 분명히 배운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겸손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겸손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피하려 한다. 나를 연약하게 하고 나를 겸손케 하는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는 고통 가운데 회피하려 한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울이 그토록 겸손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주 예수님의 임재하심 때문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바울은 자신의 모든 혈육의 욕심을 분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모든 굴욕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도 능히 우리도 겸손해질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나를 낮추는 사람들의 말들, 나를 연약하게 하는 갖가지 고난과 역경들, 광풍들을 기쁨과 자원함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 통해 더욱 더 낮아지고 더욱 겸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겸손의 능력이 충만해질 때 그리스도의 임재하심도 더 확실해진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참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제 12 장 ] 겸손과 영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14:11)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4:10)
그럼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5:6)

어떻게 하면 교만을 이길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순간 순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즉 낮아진 나를 높이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행할 때 하나님도 약속하신 그것을 친히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명-자신을 낮추라-을 순종하고자 할 때 우리는 더욱 더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뿌리 깊은 교만, 낮추기 싫어하고, 내세우기만 좋아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깊은 교만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교만을 제거하려는 우리의 처절한 노력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까지도 너무나 무력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는 오직 우리의 전체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인내로써 자기 안의 모든 교만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행해야 하겠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 교만해지려는 마음을 낮추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주님께서 반드시 이런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기도를 받으사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고 겸비하게 하실 것이다. 겸손하신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심령에 거하실 것이다.
인간의 최고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고 선포하며,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는데 있다. 이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철저하게 비워지고 낮아지며 하나님만이 전체가 되셔야 한다.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속히, 더욱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부가 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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