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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1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9409    

“방언은 귀한 은사, 그러나 균형 잡힌 이해가 꼭 필요하다”


한국 교회에 때아닌 방언 열풍이 불고 있다. 20세기 초 오순절 성령 운동과 함께 불기 시작한 이 열풍은 점점 거세져 급기야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상관없이 교파를 초월해 온 지구상의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방언 열풍은 성령 체험과 은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뜨겁게 달군 반면,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자국처럼 세계 교회의 처처에 상처와 갈등과 분쟁을 남겼다.

이제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상처는 아물고 그 열기에 대한 추억마저 아스라이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유독 한 곳, 한반도에만 이 열풍이 또다시 불어닥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를 다시 강타한 방언 열풍

과거에도 한국 교회에서 방언은 성령 세례와 함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고 많은 교회들이 이로 인해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다행히 그 논쟁의 열기는 한풀 꺾여 사그라지고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방언의 열풍이 다시 불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왜 한물간 유행이 복고풍으로 다시 인기를 끌듯 방언이 다시 주목받는 것일까? 그동안 한국 교회가 평양 대부흥 백 주년을 맞이하여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기도해 왔는데, 그 기도의 응답일까? 그보다는 무엇인가 영적 침체의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는 많은 교인들에게 방언은 손쉽게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반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온 듯하다.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것에 끌리는 한국 교인들의 종교적 성향과, 극적인 변화와 확신을 안겨 주는 획기적인 은혜 체험을 바라는 교인들의 영적인 요행심에 방언이 딱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든 교인들의 열심을 자극해 교회를 속히 부흥시켜 보려는 사역자들의 열망과 그것을 부추기는 데 성공한 대중 매체의 역할이 절묘하게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이 방언이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기독교 서적과 인터넷 매체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들의 탁월한 기여가 없었다면 방언 열풍은 결코 한국 교회에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현 씨처럼 대중과 잘 소통하는 뛰어난 기술과 은사를 가진 이의 글을 통해 사그라졌던 방언의 열기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방언 열풍의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하늘의 언어」(규장)라는 책의 등장이다. 이 책의 저자 김우현 씨는 이미 KBS ‘인간극장’ ‘친구와 하모니카’로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방송계에서도 인정받은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이며 연출자다.

그는 ‘팔복 시리즈’와 「부흥의 여정」(규장)으로 교계에도 널리 알려졌고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기독교 작가로서의 위치도 굳힌 사람이다. 그는 방송 작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하여 대중의 심리와 감성에 효과적으로 호소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이야기를 구성해 가는 데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다.

그의 책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은 아마도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성령 체험담을 마치 다큐멘터리가 눈앞에 펼쳐지듯 실감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해 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이론적인 책과는 달리 그의 책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도록 독자들의 공감과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방언 열풍을 촉발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방언의 유익과 가치에 눈을 뜨고는 방언 체험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종종 듣게 된다. 그의 책이 이런 ‘개종’의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체험담의 대부분이 방언을 하찮은 은사로 무시했던 이들의 ‘회심’(방언에 대한 회심)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늘의 선물을 아직도 거부하고 있는 ‘죄인들’을 돌이키는 데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연이어 ‘개종’하는 사건을 기록하였다. 규장출판사의 대표까지 방언을 체험하고 그가 받은 놀라운 은혜를 혼자만 누릴 수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방언받기를 권하는 ‘방언 전도사’가 되었다. 급기야 이 방언의 불길은 규장출판사 전 직원과 자매 회사인 갓피플닷컴 직원에게까지 번졌다. 한꺼번에 70명에 달하는 직원이 방언을 받고 무려 3시간에 걸쳐 방언 기도에 전념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선교사는 마치 오순절 부흥의 현장이 재현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저자는 그동안 줄곧 추구해 온 한국 교회의 부흥이 방언 체험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도 부흥의 불길이 온 땅에 확산되기를 바람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서적과 인터넷을 통해 방언을 파급시키는 것으로 부족해 자신이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며 방언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방언이 바로 하늘의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이며, 이 잊힌 통로를 재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의 길이라는 메시지가 전국 구석구석에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는 오순절파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단이 예외 없이 방언 열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과거에는 방언이 지성적이지 못한 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방언에 열광하는 형편이다.

이런 추세에 저항하여 전통적인 신앙의 기치를 높이 든 이는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김우현 씨와 같은 평신도였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부흥과 개혁사)라는 책은 김우현 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양측의 입장이 극과 극을 이루며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택대학교의 김동수 교수가 방언에 대해 양극화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책을 펴냈다. 드디어 평신도들의 논쟁에 신학자가 끼어든 셈이다. 그는 두 사람과는 달리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로서 방언에 관련된 성경 말씀을 꼼꼼히 주해하고 정리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한 견해를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결론적인 입장은 양극단적인 견해를 원만하게 조율하기보다는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 격이 되었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라는 그의 책 제목이 이미 시사하듯이 김우현 씨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 셈이다.

결국 양극화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갈등과 대립의 골이 깊어만 가고 있다. 「하늘의 언어」로 촉발된 방언 열풍은 그에 대한 반박과 이어지는 논쟁들로 인해 더욱 거세져 한국 교회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 방언 열풍은 한편으로는 신앙 생활에 취미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관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며 일시적으로 교회를 뜨겁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더욱 시들게 하는 이중적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이 “이 시대의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늘의 전략”이라는 김우현 씨의 주장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 전략일 뿐 진정한 하늘의 전략은 아닌 듯하다.

김우현 - 하늘의 언어

김우현 씨는 그의 책 「하늘의 언어」에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무시했던 방언의 은사에 뜻밖에도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바로 방언이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해 예비하신 가장 강력하고 충만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 즉 “하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통로”라는 사실이다.

방언은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통로이며, “지치고 무기력해진 주님의 교회를 강하게 충전시키는 귀중한 에너지”다. 더불어 방언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강력한 방편인 동시에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비밀 병기다. 그렇기에 “이 영적 기도의 언어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수행했던 모든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방언에 대해 이처럼 극찬을 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참으로 유별난 책이다. 방언을 성령 세례의 증거로 보았던 오순절 교회에서도 방언을 이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 논하면서도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온 방언에 대한 책들의 대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바탕 위에서 쓰였다. 그러나 김우현 씨의 책은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제시나 기본적인 신학적인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주관적인 생각과 확신을 마치 하나님의 생각이며 말씀인 양 마구 쏟아놓은 책이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확신을 성령의 음성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데서 사태는 더 심각해지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할 위험이 커진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열심과 사랑은 뜨겁지만 그의 신앙은 말씀의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성경의 큰 그림을 볼 줄 모른다. 성경을 전체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라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의 큰 윤곽이 드러난다. 김우현 씨는 전체 그림의 극히 미세한 일부분이 마치 가장 중심적이고 모든 것인 양 단순화하고 과장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 결과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계획과 전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작은 하나의 방편만이 핵심 전략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총체적인 개혁과 부흥의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며 이에 부응하는 부흥관의 정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런 부흥에 대한 올바른 신학이 없으니 부흥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잡다한 가르침들을 따라 목사들과 교인들이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험하고 멀더라도 부흥의 정도를 밟아가기보다 속성으로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원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방언을 체험하기만 하면 진정한 부흥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같이 약속하는 희소식에 매료되는 모양이다.

김우현 씨가 말하는 방언 체험의 유익은 가히 환상적이다. 방언만 체험하면 오래 계속되는 영적 침체에서 확실하게 벗어나고, 자신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이 비밀 통로를 발견하기만 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세계로 들어가 하늘의 강력한 능력을 받게 된다고 하니 이런 은혜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가르침은 단숨에 충만한 은혜를 받는 횡재를 바라는 영적인 요행 심리를 조장하여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으나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인도하기에는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체험을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하심과 은사들 중에 유독 방언의 은사만을 이토록 부각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균형을 현저히 상실한 가르침이며 교회를 부흥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위험성이 높다.

그의 주장대로 방언이 하늘의 충만한 은혜를 여는 가장 강력한 통로라면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히 성령 충만함을 누리기 힘든 영적인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하늘의 능력과 은혜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을 받아야 한다. 방언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받으라고 권한다. 이런 가르침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조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누리기를 바라는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방언을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 큰 소외감과 상처를 안겨주며 또한 그들을 은혜 없고 영적 결함이 있는 교인으로 보는 무례를 범한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신앙의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을 때 교회에 큰 폐해를 입힌다.

방언의 유익과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는 귀하다. 그러나 말씀의 한도 내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의 인기몰이를 하는 데는 완전 실패했겠지만 교회에 혼란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방언의 놀라운 유익을 강조하는 데에서는 성경이 전혀 말하지 않는 데까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비약한 반면에, 방언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그의 책에서 방언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를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바울이 염려했던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옥성호 -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극단은 항상 또 다른 극단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은 제목에서부터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글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인 논리를 거의 제시하지 못한 김우현 씨와 달리 이 책을 쓴 옥성호 씨는 방언에 대한 많은 신학 서적을 읽고 성경 주석들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방언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제시하려 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를 강타하는 방언 열풍을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말씀을 향한 또 하나의 사탄의 공격”으로 보았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체험을 검증하기보다 우리의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왜곡하고 거기에 꿰 맞추려는 경향을 개탄하면서 방언 현상을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말씀을 통해 냉철하게 검증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김우현 씨와는 정반대로 그는 방언을 하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은사가 아니라 가장 남용될 가능성이 높은 은사로 보았다. 성경은 방언을 권장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하고 선별해야 할 대상의 은사”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이 바울 사도가 그토록 방언의 은사를 특별하게 다룬 유일한 이유라고 보았다.

옥성호 씨가 「하늘의 언어」가 무시해 버린 바울의 메시지에 다시 주목하며 방언 현상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려고 한 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은 지나치게 특정한 신학적 전제, 즉 ‘은사중지론’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 그 전제는 방언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그는 모든 체험은 반드시 말씀에 비추어 검증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체험뿐 아니라 모든 신학적 전통까지도 성경의 빛 가운데 점검해야 한다는 확신은 없는 것 같다. 성경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신학적 편견을 성경적으로 진단할 만한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듯하다.

잘못된 신학적 선입견에 한번 사로잡히면 거기에 맞추어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김우현 씨가 체험에 치중한 나머지 말씀을 무시했다면, 말씀을 수호하려던 옥성호 씨는 신학적인 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성경 말씀을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가 신학적인 전제를 투사하여 성경을 해석한 대표적인 일례는 고린도전서 13:8-12에 대한 해석이다. 이 대목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옥성호 씨는 방언과 예언이 다 폐하고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바로 성경이 완성될 때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아직 없었던 초대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중요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완성되자 이 은사들은 그 목적을 완수했기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성경 본문을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보다 ‘은사중지론’의 안경을 끼고 읽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문맥을 통해 볼 때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 사도는 절묘한 시적 표현을 통해 사랑의 탁월성을 찬미한다. 그는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이 더 큰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큰 은사가 아니고 은사를 사용하는 더 좋은 길일 뿐이다.

다만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탁월하며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나 예언과 방언은 종말에는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가면 믿음과 소망이 바라던 것도 성취될 것이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이다(고전 13:13 참조).

고린도전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어조는 확연히 종말론적 특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말씀은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성경이 완성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완결된 성경이 주어지면 내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주님이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되는가?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서기까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해석은 앞뒤 문맥과도 상충될 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도 배치된다. 바울이 그 글을 쓸 때 자신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완성될 것을 예견하여 그런 의미를 담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불과하다. 이런 해석은 바울 사도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뜻을 투사하여 그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요즘 신약학자 중에서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은사중지론의 대부 워필드의 뒤를 이어가는 개핀(Gaffin) 교수마저 이런 해석은 바울의 관점을 현저히 곡해한 것이라고 배격했다.

또한 옥성호 씨는 은사중지론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 방언은 예언과 함께 성경 계시가 주어지는 방편이었기에 계시가 완료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가 계시의 방편이라는 견해를 입증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방언의 특성상 그것은 타당하지 않은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방언이 성경적 계시의 통로라면 사도들에게만 주어졌어야 할 텐데 사도들 외에 많은 신자들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면 그들도 모두 계시의 전달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계시적 권위를 가진 방언과 일반 신자들에게 주어진 비계시적 방언은 도대체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이런 유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고린도전서 12-14장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성경 해석의 오류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별히 ‘사랑 장’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을 쓴 바울의 의도와 거기에 담긴 바울의 교훈을 온전히 간파하지 못했다. 그 결과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공정하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만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바울 사도가 사랑 장을 쓴 목적이 방언을 최고로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방언보다 사랑을 더 우선적으로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랑은 방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좋은 길”이라고 했다. 일견 그의 견해는 타당해 보인다. 바울이 사랑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이 더 탁월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인 것 같지만, 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만약 그런 식으로 사랑 장을 이해하면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석할 경우, 사랑에 의해 은사가 열등한 자리로 밀려나고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사랑을 구하는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명령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결코 사랑을 제시하여 상대적으로 은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은사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의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사랑과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추구하고 사용하는 서로 다른 두 방식들이다. 곧 은사가 이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그것이 사랑을 따라 활용될 수도 있다. 은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면 교회에 혼란과 분쟁을 야기한다. 그러나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사용할 때,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유익하고 풍요롭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고전 13:8-13 참조). 따라서 사랑은 은사를 추구하고 사용하는 더 탁월한 길이며 방식이다.

사랑 장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사랑뿐 아니라 은사도 중요하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과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은사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이며 능력이다. 은사 없이 사랑의 소원과 목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만을 강조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가르침이다. 옥성호 씨는 “바울은 13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은사가 있더라도 그 은사 속에 사랑이 없으면 은사가 없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 장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를 잘못 읽은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은사로 인해 분쟁과 혼란이 야기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그들의 은사 추구를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라고 권면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고 논란이 많아 여기서 다 다룰 수 없다. 이에 대해 의문이 있는 이들은 필자가 이 구절을 좀 더 자세히 다룬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열정이 육적이고 이기적인 동인에 의해 자극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은사에 대한 열정이 교회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방식으로 분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은사 추구가 지향해야 할 훨씬 더 바람직한 방향, 곧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은사를 그 본래의 기능대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한 바탕 위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은사와 사랑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은사에 대한 바울 이해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근본 사상인데, 옥성호 씨는 애석하게도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은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부정 일변도로 치우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김우현 씨는 방언의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남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함구했다면, 옥성호 씨는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방언의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해 버렸다. 그래서 두 견해는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


김동수 -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이렇게 방언이 하늘의 언어인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면서 이 논쟁에 마침표라도 찍으려는 듯 황급히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한 책이 연이어 발간되었다. 바로 김동수 교수가 쓴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라는 책이다.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입장이 양극화되어 갈등과 혼란이 점증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껴 서둘러 쓴 글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옥성호 씨의 책을 집중적으로 반박하면서 그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가를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신학을 전공한 프로답게 성경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자신의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였다. 방언이 지금도 존재하며 신앙 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은사임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나서 어떻게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는 김우현 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하늘의 언어」라는 책에 대해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고, 성경적인 고찰이 부족한 점을 유일한 아쉬움으로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 결함을 보완해 주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책에서 김우현 씨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그의 책의 핵심논지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맞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우려한 문제, 즉 방언으로 인해 교회가 양극화되는 현상을 해소하는 데는 그의 책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셈이다.

김 교수는 옥성호 씨가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한 부분들을 잘 지적하여 교정해 주었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이 아니었다는 점, 고린도전서 13:10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종말을 의미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는 제일 좋은 길이라는 점 등을 올바른 성경 해석을 통하여 잘 밝혀 주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그의 해석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신학적으로 별 하자가 없다.

이처럼 방언에 관련된 많은 성경 구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 대체로 원만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성경 말씀을 무시해 버린 김우현 씨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성경을 충실히 해석해서 이르게 된 결론이 성경적 근거 없이 경험에서 나온 주관적인 확신과 엇비슷한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방언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방언 체험 유무와 거의 일치한다. 예외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방언을 체험했는가 아니면 안 했는가가 방언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김 교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그가 확신한 대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체험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연구를 조종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 교수도 자신이 방언 체험에서 얻은 확신, 즉 방언은 하늘의 언어라는 전제가 그의 성경 해석과 논리 전개의 모든 과정을 은밀히 주관하고 있지 않은지 냉철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어떤 전제를 가졌느냐에 따라 어떤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어떤 측면을 더 부각시키며, 또 어떻게 그 전제를 맞추어 자료를 분석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지가 결정된다. 똑같은 성경 본문을 다루면서도 전제에 따라 보는 각도와 강조점이 다를 수 있으며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김 교수의 책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드러난다. 그는 방언을 긍정하는 말씀만을 다루고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회피해 버렸다.

방언의 밝은 면은 최대한 부각시킨 반면, 그늘진 면은 최대한 숨겨 버렸다. 어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무리하게 뒤틀어서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해석을 뒤집어엎는 아주 독창적인 이해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 보기로 하자.

먼저 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방언관을 교정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14장을 썼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옥성호 씨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이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고 보았다.

두 입장 모두 서로 상반되는 편견에 이끌려 본문의 분명한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는 기본적 균형 감각을 상실한 듯하다. 옥성호 씨는 바울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기조를 이루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여기에는 방언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며 성장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은사로 인해 대혼란이 빚어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은사에 대한 추구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권면하였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은사가 잘못 사용되면 교회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그런 메시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해 야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었다. 곧 은사를 사랑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은사를 대체하는 더 우월한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더 잘 사용하게 해주는 탁월한 방식이다. 사랑은 은사의 가치와 역할을 하락시키기보다 은사의 효력을 더욱 고취시킨다. 사랑은 은사를 빛나게 하고 은사는 사랑을 성취시켜 준다. 사랑과 은사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꼭 있어야 할 단짝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은사에 대한 바울의 기본 입장이다. 방언에 대한 이해도 이런 맥락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라는 김 교수의 지적은 백 번 타당하다.

바울은 결코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다른 은사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방언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다. 은사 추구를 장려하는 그의 권면에서 방언만은 제외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두가 자신처럼 방언하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그의 심정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에 대한 그의 언급에 부정적인 어조가 강하게 깃들어 있는 것은 방언이 그 특성상,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성향 때문에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고린도 교회 안에 그것으로 인한 갈등과 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바로잡고 은사 사용의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김 교수의 문제는 바울이 방언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을 변호하는 데 급급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고찰하지 못한 점이다. 방언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바울의 언급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하고 이런 문맥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만을 국부적으로 발췌하여 자신의 입장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온전한 바울의 메시지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방언이 잘못 사용됨으로 야기될 수 있는 혼란과 문제점을 다룬 바울의 교훈은 침묵 속에 묻혀 버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에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수사학적인 표현을 통해 사랑이 없는 방언이 다른 이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자기 과시와 만족을 위해 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무질서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혼란과 갈등만 조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방언이 잘못 사용되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13장의 비유적인 표현과는 달리 14장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14장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방언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공동체에 덕을 끼치기보다 해를 입히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며 경계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6-9, 16-17, 19, 23).

비록 바울이 방언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서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보다 방언이 남용될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김 교수는 어떤 본문을 자신의 주관적인 확신에 지나치게 꿰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라고 한 바울의 말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가 모든 신자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 본문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해석은 그 말씀의 문맥과 정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역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교인들이 예배를 할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즉, 사적으로 기도할 때가 아니라 공적으로 예배할 때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문맥과 조화되지 않는 무리한 해석이다. 그가 지적했듯이 고린도전서 14:26 이하에는 공적 예배의 상황이 묘사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2장의 문맥과 정황은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의 사역 일반과 관련된다. 12장 전체에서 바울이 전달하려는 일관된 메시지는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여럿이고 은사는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의 지체가 다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에게도 다 똑같은 직분과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다 동일한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고 반문하였다.

12장 전체 문맥만이 아니라 바로 앞 구절의 말씀만을 살펴봐도 이 말이 예배에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여러 직분을 세우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이것은 바울이 예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교회 직분과 은사 일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교회에 여러 직분이 주어졌으니 모두가 같은 직분이나 은사를 가질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김 교수는 왜 이렇게 성경의 명료한 뜻을 왜곡하는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성령의 은사가 모두가 다 받을 필요가 없지만 예외적으로 방언만은 모든 신자가 다 받아야 할 은사라는 그의 확신을 고집스럽게 성경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관철하는 데 가장 거침돌이 되는 본문, 즉 모두 다 방언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의 증거 본문을 제거한 셈이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방언을 받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의 신념을 뒷받침할 성경 본문을 찾아냈다. 그가 유일하게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14:5이다.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되는 것이 자신의 분명한 뜻임을 밝힌 것이다. 즉,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실제 가능한 일이기에 그렇게 되기를 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하다’라는 바울의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이해를 초월한 지나친 비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독신에 대해 논하면서도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전 7:7)라고 하였다. 거기서는 바울이 실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김 교수는 그 말씀은 전후 문맥에서 그 소망이 실현될 수 없음이을 확신한 반면, 방언에 대한 바울의 소원은 그 문맥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렇게 억지스러운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라는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 구절만이 아니라 12장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바울은 12장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시하였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다 같은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못 박아 말하였다. 이런 명확한 말씀을 곡해하니까 억지로 꿰 맞추기식의 무리한 해석이 이어진 것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소망을 이렇게 무리하게 해석한 것으로 부족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비약해 버린다. “하나님이 지금 모든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도 같은 것이다.” 즉, “개인 기도로서의 방언의 은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경험하여 하나님과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 없이 잘못된 해석과 지나친 비약으로 이끌어낸 결론일 뿐이다. 오히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은사의 기본적인 특성은 선별적이라는 점이다. 바울이 계속 강조한 것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의 다양성이다. 그는 은사를 획일화하는 위험성을 엄중히 경계하고 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특정 은사를 획일화함으로써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 결국 고린도교회에서처럼 방언을 과대평가하여 다른 은사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제가 재현될 것이 뻔하다.

만약 다른 은사는 모두 선택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모든 이들에게 다 주어져야 한다면 방언을 다른 은사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다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은 단순히 은사가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인 기도처럼 자주 강조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외에 방언을 언급한 예는 없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라는 말씀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자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기도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탄식이 방언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간구하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그들의 기도가 어찌 천상을 가르고 하늘의 보좌에까지 상달될 수 있겠는가? 김 교수는 그렇게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의 성경 해석은 이런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는 것을 피하기 힘들다.


방언은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할 은사인가

김 교수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방언은 모든 신자에게 꼭 있어야 할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다. 그는 책 앞부분에서 자신이 방언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온건하게 인정하는 입장을 위한다고 밝혔다. 방언은 신앙 성숙의 척도가 아니며 하나의 도구이기에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2급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갔다.

이 정도면 그의 견해가 나무랄 데 없이 건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책이 도달한 결론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그런 언급은 그의 견해가 건전하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표방한 것에 그칠 뿐 실제 내용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만은 예외 없이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한다고 고집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옮기면, “방언 기도가 신앙 생활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앞부분에서는 방언이 “하나의 도움”이라고 말해놓고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며 그의 입장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신자가 방언을 받아 하나님과 하늘의 언어로 교통하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바울의 뜻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리고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방언이 다른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일 수 있고 사실상 중요한 통로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결국 성경적 수준에 미달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 셈이다. 신앙 성숙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은혜의 방편이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열등한 2급 신자의 신세를 면할 수 있으랴!

방언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그의 행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든 교인들이 방언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에 사로잡혀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참석한 전 교인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려 했다. 그는 방언을 하는 이들은 “이 은사를 다른 사람들도 체험하게 하여 같은 복을 누리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라고 역설했다.

그도 역시 김우현 씨처럼 방언 전도사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강권하여 방언을 받게 하려고 한다. 그의 책에 방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방법대로 방언을 받게 한 실제 사례를 소개하였다.

“수련회나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저는 첫째 날 일단 한 명이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합니다. 한 명만 받으면 그 다음에는 쉬워집니다. 방언받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1분간 간증을 시키면 그 다음에는 방언받는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친구가 받으면 열불이 나서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경쟁심이 자극되면 다 방언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김 교수는 그렇게 해서 나타난 현상이 성경적인 방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증하는가? 일일이 다 검증해 보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부흥사들이 그러하듯이 혀가 꼬여 이상한 말이 나오면 무조건 방언이라고 보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의 말인지 귀를 의심하게 된다. 성경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삼류 부흥사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방언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논하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약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미심쩍은 행위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진다. 물론 이 뜻은 인간의 원함을 무시하지 않고 그 갈망에 따라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나서서 사람들을 강권하다시피 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그런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도록 교묘히 유도하는 행위는 전혀 성경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의 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성경의 분명한 진리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행위를 통해 촉발된 현상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는 없다. 질투심과 경쟁심에 의해 자극된 열심과 인간이 은사를 유도해 내려는 은근한 교만으로 점철된 것에는 오히려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일종의 집단 최면이나 흥분 상태로 사람들을 몰아가 그런 현상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견해가 예외 없이 그 사람의 방언 체험의 유무와 일치한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켜 주었다. 영적인 은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방언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체험을 해석하여 성경 본문에 대입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제라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견지해 온 입장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어떤 주관적인 확신을 주입해서 성경을 읽는 것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책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김우현 씨의 책보다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미혹하게 하는 위험성이 더 클 수 있다. 그것은 학자의 깊이 있고 권위 있는 성경 해석에 근거한 주장이기에 독자들은 그만큼 설득되기 쉽고 반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자와 선생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의 견해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과거 고린도 교회 안에 방언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과 혼란을 고스란히 한국 교회 안에 재현시킬 수 있다.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있어야 할 필수적인 은사라는 주장은 가진 자의 우월 의식과 못 가진 자의 열등 의식을 조장하여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못 가진 이들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영적인 교제와 신앙 성숙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은사가 없으니 어찌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급 신자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반면에 가진 이들은 노골적으로 우월 의식을 표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은사가 없는 이들을 무엇인가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받는 방언을 못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면 방언 못하는 이들은 무엇인가 영적으로 결핍되고 열등한 신자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가 어렵게 된다. 모두가 다 방언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방언 못하는 이들은 이 주님의 뜻에 못 미치는 삶, 즉 주님이 의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충만한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셈이다.

방언 은사로 인해 전혀 교만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방언을 모두가 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교만인 것이다. 그런 주장 자체에는 깊은 우월 의식이 잠재해 있을 뿐 아니라 많은 혼란과 갈등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방언 열풍이 한국 교회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피해 사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모두 방언 받을 것을 강권하는 집회에서 끝내 방언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은사 체험에서 자신들만이 제외되는 소외감과 하나님에게까지 ‘왕따’를 당하는 씁쓸한 비애를 느끼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자신만 외톨이로 남고 싶지 않은 절박한 심정에서 방언 전도사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굴려 “랄랄랄라”를 연발하며 인위적으로라도 방언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 내려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방언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 한 맺힌 신앙 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한 권사는 오랫동안 방언을 사모하여 구해 왔음에도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산다. 그녀는 아주 신실하고 경건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 방언을 못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 이 죄의식과 함께 자신만 외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이 그녀의 마음속에 뒤엉켜 있어 주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방언을 모든 신자들이 꼭 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목사나 전도사 밑에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 중에 방언을 못하는 교인들은 무척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을 지도하는 한 전도사는 방언을 못하는 학생들을 방언을 받을 때까지 교회에 잡아 놓고 기도하게 해서 말썽을 빚은 적이 있다.

반면에 방언은 다 받아야 한다고 믿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방언을 못 하는 목사나 복음 전도자가 엄청난 고충과 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체험한 몇몇 집사들이 담임목사에게 방언을 하느냐고 물었다. 목사가 방언을 못한다고 하자 그들은 평신도도 하는 방언을 목사가 하지 못하면 어떻게 교인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였다. 그 목사는 방언을 못하는 이유 때문에 목사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떤 신학생이 노회에서 신학을 계속 공부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여러 목사들 앞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세 명의 다른 신학생과 함께 면접을 보았는데 한 목사가 방언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나머지는 다 받았다고 대답했는데 자신만 방언을 받지 못했다고 하자 기도를 잘 하지 않는 전도사라며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방언을 어떻게 가르쳐야할까?2
교회력과 성서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