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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을 어떻게 가르쳐야할까?2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9973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 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방언에 대해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 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 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 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에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고전 13:8-12 참조)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를 보건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 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 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 또는 ‘이성’을 뜻한다. 즉,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때의 방언이 어떤 말의 형태로 나타났는지, 어떤 음률과 강세를 띠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가 단음절로 끊어졌는지 연음으로 유연하게 이어졌는지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 녹음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이기에 그 진실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 중에는 의심쩍은 것들이 적잖다.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각별한 주의와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다 마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명수이기에 얼마든지 은사의 모조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의 부인은 한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후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자 방언도 같이 사라졌다.

또한 몰몬교 같은 이단이나 타종교에도 방언과 유사한 종교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무조건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이 과연 성령의 은사인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언은 모두가 다 받아야 하는 은사라는 주장만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없다. 다른 은사는 선택적이지만 방언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견해는 왜곡된 성경 해석이 아니고는 도저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 은사는 모두 선별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필수적이라면 방언은 더 이상 은사로서의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한 것이며, 은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방언을 모든 신자가 다 받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실제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 중에서 방언을 부인하고 구하지 않는 이들은 못 받는다고 쳐도 방언을 간절히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그런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와 같은 직분과 은사는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서 된 것이다. 모두 순수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물론 어떤 은사는 받는 자의 소원과 간구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면서 애타게 구해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애먹이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하기 전에라도 자연스럽게 주어지며, 구하면 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방언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방언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기로 하신 선물이 아닌 것을 한사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또 방언을 더 이상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는 선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방언을 달라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해 내려고까지 하는 것은 그 선물을 뺏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미치는 폐해는 엄청나다. 교인들 모두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사 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완전히 획일화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이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도 자신이 누리는 은혜를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자신의 잘못된 확신을 따라 다른 이들을 강압하려는 교만의 발로다.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우월 의식을 낳고, 그 반대급부로 영적인 열등 의식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급기야는 그로 인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한다.

이런 문제는 실제 교회 현장에서 더 역력히 드러난다. 방언이 모든 신자의 영적인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은 자연히 방언을 못 하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열등한 신자로 강등시킨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떻게 영적인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모든 신자에게 필히 있어야 할 은사이기에 강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그렇게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가 유행병처럼 번져간다. 그런 집회에서는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라는 진리는 묵살되어 버리고 방언을 꼭 받게 하려는 인간의 강권이 은사를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압도해 버린다. 마치 방언이 인간에 의해 유도될 수 있는 것처럼 방언 전도사들은 가는 곳마다 방언의 돌풍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안겨 준다.

일단 한 사람만 방언을 받게 하면 다른 이들의 시기심이 자극되어 방언하는 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부패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열심을 부치기는 방언 전도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조작되는 일종의 영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방불하게 한다. 이것을 은사를 나눠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모아놓고 강권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모두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처사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주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방언을 받게 부추기고 강권한 예나 그런 행위를 권장한 말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순리적인 역사하심에 배치되는 행위를 통해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쉽다.

그런 집회의 진정성은 그 열매로 드러난다. 집회에 모인 교인들이 모두 방언받기를 강권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모든 신자에게 예비된 하늘의 선물이 자신들만 비켜가는 것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들에게만 싸늘하게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을 느낀다. 이런 집회는 어떤 이들에게는 흥분과 기쁨을 안겨주지만, 다른 교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회의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희열과 감정적인 도취를 맛보는 대가로 다른 형제들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김우현 씨는 방언이 작고 소외된 이들을 세우는 귀한 은사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에서는 도리어 방언이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된 이들을 더 소외시키고 짓밟을 수 있다.

방언 집회가 성행하며 방언 전도사들이 맹활약을 하면서 이런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경은 공중에서 방언을 마구 해대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다. 방언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은 이 성경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과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방언 집회로 인한 좋은 열매까지 싸잡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방언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고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과 실제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방언 체험의 경우가 특별히 그렇다. 왜냐하면 방언은 그 특성상 가장 전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과 센세이션과 표적을 동반하기에 그 당시에는 굉장한 부흥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시간을 두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집회에서 방언받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지속적인 변화가 나타나는지 조사해 보았는가? 그런 변화의 열매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물론 그런 열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방언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열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삶과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꾸준히 말씀에 따라 성령과 동행하는 신앙 훈련을 대신하는 임시변통의 은혜 체험으로 그치고 만다.

김우현 씨의 글에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방언 체험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히게 한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는 수많은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부진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에 여념없는 목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흥분과 감흥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이 있어야만 신앙을 지탱하고 열심을 내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방언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적이기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개인과 교회에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의 실용주의 가치관과 이런 대중의 심리와 관심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영적 현상을 대중화하여 큰 이익을 챙기는 기독교 상업주의가 한국 교회에 방언 열풍을 몰고 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이 지금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흥 코드’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침체한 한국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기 위한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충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방언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방언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의 귀한 은사다(고전 12:4-28 참조).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남용은 교회를 허물지만 방언의 선용은 교회를 세운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 인격자와, 형제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건전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가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은사를 조금이라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다 자신과 같은 은사를 체험해야 한다고 강권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언함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위축되며 혼란스러워할까 우려하여 공중에서 방언하는 것을 절제한다. 방언하는 이들 중에 이렇게 겸손하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다. 이들처럼만 한다면 방언으로 인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바울이 가르친 바이다. 방언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하나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방언하는 이가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기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뉴욕에 있는 어느 한인 순복음 교회 집사가 필자가 잘 아는 목사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집사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많은 집사들 중에 유일하게 방언을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방언을 구했음에도 하나님이 방언을 안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이나 답답해하며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장로교 목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목사는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은 방언이 꼭 있어야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기에 방언을 주시지만, 집사님은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기도와 경건 생활을 잘하실 수 있을 것 같기에 방언을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사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향과 사명과 상황에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은혜를 주기 원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시기에 그 은사를 안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상의 은혜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에 꼭 필요한 은사이기에 방언을 못하면 뭔가 영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신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방언을 못 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이들도 많다.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방언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과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성 프란체스코, 칼뱅,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이 그랬고,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등 수많은 훌륭한 목사들과 교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방언 체험의 유무는 결코 신앙 성숙이나 영적인 충만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누린다는 점이다(고전 14:14-18 참조). 그로 인해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방언을 체험함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신앙의 열심이 자극된다. 기도를 잘 안 하던 이들, 5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것이 없던 이들이 기도를 자주, 오래 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니 기도를 10분도 못하는 교인들은 방언이라도 받아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만하다. 거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기도를 안 하던 이가 방언을 체험한 후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만 여전히 생각과 이성을 통해 기도하는 데는 전혀 진보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마음(생각, 이성)이 열매 맺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4:14 참조). 생각 없이 기도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이지적인 관계가 성숙하지 못한다.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현상에 탐닉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수 있다. 또한 방언 체험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반면에, 항상 그런 표적과 증거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영적인 미성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의 실제적인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방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온 어느 목사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볼 만하다.

“나는 방언을 30년 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방언이 100퍼센트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 마음이 주께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실이 방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하는 이들 중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며 시간만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방언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다. 방언 집회에서 방언과 같은 현상을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방언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권면은 자신의 방언이 과연 성령이 주신 은사인지 냉철하게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은사를 주신 뜻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림으로써 은혜가 충만하여 교우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미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들이 누리는 방언의 은사가 더 빛을 발하게 되며 다른 교우들도 그런 은혜 체험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아집을 내려놓고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에 내려주신 귀한 은사라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이 다 성령의 은사인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하지만, 교인들이 하는 방언을 다 싸잡아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것이라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라고 했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멸시하고 평가절하하거나 방언하는 이들을 광신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방언의 은사를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선도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은사 체험을 존중하며, 제대로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서로 화합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갈등의 요인이 아니라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이다. 방언 열풍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화평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한국 교회를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IVP)에서

성탄절에 대하여
방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