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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 션샤인> ‘김희성’처럼… 구한말 푸른 눈의 언론인
   글쓴이 : 바이블넷     조회 : 101    

베델
▲베델(왼쪽)의 모습. ⓒ국가보훈처

인기리에 방영중인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선교사’가 극의 주요 흐름을 좌우했다. 종살이하던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은 어린 시절 쫓기다 선교사 ‘요셉’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해병대 대위이자 미 공사관 영사대리로 고국에 돌아온다.

그러다 선교사가 의병활동을 도우려다 죽음을 당하자,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던 주인공 유진은 진상을 파헤치면서 의병들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던 시대, 여자 주인공 ‘고애신(김태리)’는 선교사가 세운 학당에서 여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된다. 이들 외에도 구동매(유연석), 김희성(변요한), 쿠도 히나(김민정), 이완익(김의성) 등이 등장해 구한말 조선의 생활상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구한말 선교사들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조선인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였다. 왕인 고종도 선교사들을 신뢰했고, 선교사들은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했다. 모처럼 대중매체에서 그 시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이 때, 구한말 목숨을 걸고 이 땅에 들어온 주요 선교사들의 이야기들을 책과 문헌, 영상 등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베델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모습. ⓒ국가보훈처

    

◈대한매일신보 창간한 언론인, 불꽃처럼 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선인 김희성(변요한)은 한량처럼 살아가다, 글의 힘을 믿고 신문사를 세워 ‘애국도 매국도 모두 기록하는’ 일을 시작한다.

‘푸른 눈의 선교사들’ 중에서도 조선을 위해 글의 힘으로 싸웠던 이가 있었다. 영국 출신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은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설자이자 초대 사장을 지냈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판하고 규탄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고종 황제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여 일본의 침략 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한 인물이다.

양화진 선교사 열전
▲오리 전택부 선생의 책 <양화진 선교사 열전>. ⓒ이대웅 기자

책 <양화진 선교사 열전>에서 전택부 선생은 “독립신문이 우리나라 개화기 ‘민중의 등대’ 구실을 했다면, 대한매일신보는 항일투쟁기 ‘민중의 방패, 민중의 대변자’ 구실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베델 선교사는 1904년 러·일 전쟁 때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처음 내한했다. 그런 그가 어쩌다 한국에 눌러앉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게 됐는지는 안타깝게도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한국명 배설(裵設)로도 불리는 베델은 한국행 4개월만인 1904년 6월 29일 대한매일신보 영자 신문을 만든 뒤, 7월 18일 창간호를 냈다. 당시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은 일본과 동맹 관계에 있었으나, 그는 영국인임에도 조선에서 행한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목격하고 참을 수 없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조선을 돕기 시작했다. 베델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임명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게재했다.

베델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국가보훈처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실으면서 일본군에 의해 신문 발간이 일시 정지되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검열을 겁내지 않고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하면서 일본을 규탄했다. 또 대구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졌던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 집합소가 되기도 했다.

이에 고무된 고종 황제는 모든 통치권이 박탈당한 상황에서도 1906년 2월 10일 발행인 베델에게 “신문과 통신의 전권자로 특히 위임한다”는 특별위임장을 내리고 비밀리에 운영비로 매달 1천원을 하사했다.

베델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한 대한매일신보 호외. ⓒ국가보훈처
베델
▲고종 황제가 베델에게 보낸 밀서. ⓒ국가보훈처

일제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를 참을 수 없었고,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베델의 국외 추방을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7일자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거사를 찬양한 것에 대해, 주일 영국 대사에게 강력 항의한다. 영국 외무부는 이러한 일본의 공갈에 굴하지 않았지만, 서울 주재 영국공사관 고등법원은 결국 베델의 범죄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영국 고등법원은 1908년 6월 15일자로 베델에게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의 근신을 명했다. 베델은 상하이에 끌려가 3주간 금고형에 처해 있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오랜 일제의 탄압과 경영난에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결국 그는 금고형 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서대문 자택에서 서거했다.

베델
▲그가 서거한 아스토 하우스 호텔. ⓒ국가보훈처

베델은 죽기 직전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해는 다음 날인 5월 2일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됐다. 5월 5일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추도식이 거행됐는데, 각 사회단체 대표 4백여명이 참석했다. 비문은 장지연이 순 한문으로 지었다. 이 비문은 일제가 칼과 망치로 내용을 다 지워버렸으나, 해방 20년 후인 1964년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원 비문을 새긴 새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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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 ⓒ국가보훈처
우리나라 정부는 1968년 베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는 2014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베델의 유해는 현재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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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장례식 모습.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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