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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도시 욥바와 가이사랴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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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바 :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갈때 배 탔던 유구한 역사 항구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베니게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이스라엘의 지중해변이 아닌 베니게의 지중해변에 위치한 항구도시였던 시돈과 두로를 탐방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지중해변에는 항구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욥바와 신약의 가이사랴가 좋은 예이다.

욥바는 현재 텔아비브의 지중해 해안 남쪽지역을 말하는데 높은 절벽 위에 위치해 있으며 이 절벽 바로 아래에 항구가 있다. 욥바는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한다. 이는 도시의 이름을 왜 히브리어 ‘요피(아름다움이라는 뜻)’에서 가져왔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욥바는 항만의 조건이 좋지 않은 이스라엘의 지중해변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항구도시였다. 시돈과 두로에서 벌목한 백향목은 욥바를 통해 육지로 들어왔고(대하 2:16; 스 37),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는 배를 욥바에서 탔다(욘 1:2). 베드로가 머물렀던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이 살던 장소이기도 하다(행 10:32). 욥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인구가 밀집한 도시이다 보니 고고학적인 흔적들이 사라져 버렸다.

욥바에는 주전 18세기 도시 성벽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도시의 모습을 복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전 16세기에는 돌로 기초공사를 하고 진흙벽돌을 쌓아 만든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는 오랜 시간 서 있지 못했고 이집트의 흔적으로 뒤덮인 것으로 보아 이집트가 도시를 점령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1440년쯤 투트모세 Ⅲ세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나섰다. 그는 군장관 제후티(Djehuty)를 시켜 욥바의 통치자에게 200개의 거대한 바구니에 조공을 담아 바쳐 마치 이집트가 항복한 것처럼 보였다. 욥바의 사람들은 이를 축하했고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이 취했을 때 조공품 사이에 숨어 있던 이집트의 군사들이 나와 욥바를 함락시켰고 투트모세 Ⅲ세의 카르낙 신전 벽에 자신의 승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욥바는 이집트의 통치 아래 있었다. 람세스 Ⅱ세(주전 1279∼1213년)는 욥바에 자신을 위한 화려한 궁전을 지었는데 그 궁전은 이미 1950년대 캐플란(Y Kaplan)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발굴에 대한 출판물이 충분치 않아 결과물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발굴에서는 이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발견되었는데 사암으로 만들어진 문의 기둥에는 상형문자로 람세스 Ⅱ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최근 마인즈대학과 로스앤젤레스대학, 그리고 이스라엘 유물청이 함께 진행하고 있는 욥바 문화유산 프로젝트(The Jaffa Cultural Heritage Project)는 1950년대의 발굴 결과를 조사, 정리하여 출판하고, 보다 확장된 발굴 작업을 욥바에서 하고 있다. 이 발굴을 통하여 주전 2000년쯤 진흙을 빚어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린 성문이 화재에 타 버린 모습이 발견되었고 이는 이집트의 정복 결과로서 투트모세 Ⅲ세가 그의 벽부조에 진실을 말하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집트 왕 아멘호텝 Ⅲ세의 인장과 이집트 전통의 토기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이집트의 통치 역사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욥바를 정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지파는 ‘욥바 맞은편’(수 19:46)을 경계로 배정 받았을 뿐 욥바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나마도 단 지파는 지중해안 지역을 정복하지 못한 채 북쪽의 라이스 땅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욥바는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 될 수 없었다(삿 17∼18장). 이 시대에 욥바에서는 블레셋의 토기와 흔적이 보인다. 이 장소가 가나안 출신이 아닌 에게 혹은 갑돌(크레타섬) 출신이었던 블레셋의 차지였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다. 욥바 항구 입구에는 10m 높이의 검은 바위가 수면위로 솟아있는데 그리스 신화에는 안드로메다라는 욥바의 공주가 바다 괴물에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바위에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페스세우스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와서 괴물을 죽이고 그녀를 구출했다는 전설이 있다. 블레셋의 신전은 비록 바닥만 남아있기는 하지만 두 개의 기둥으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던 상당히 큰 규모였으며 신전 바닥에서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 해골이 발견되어 ‘사자 신전’이라고도 부른다.

한때 블레셋의 도시였던 욥바는 솔로몬이 베니게의 백향목을 요바로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도시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에 의하면 솔로몬이 사용한 항구는 현재 욥바가 있는 곳이 아니라 북쪽으로 5㎞ 떨어진 작은 항구 텔 카실레(Tel Qasile)였을 확률이 더 높다. 더불어 산헤립의 기록에 의하면 히스기야 시대에도 욥바는 아스글론 영지였다. 결국 히스기야를 위협했던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가나안 땅의 46개의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 욥바도 함께 파괴되었다(주전 701년). 앗수르가 멸망하면서 욥바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갔다. 알렉산더가 가나안 땅을 점령했을 때 욥바는 시돈과 두로와 함께 헬라 도시가 되기도 했다(주전 332년).

헬라의 통치가 붕괴되자 욥바는 잠시 유대인들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욥바가 유일한 항구였다는 사실은 이곳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상상하게 한다. 헬라의 프톨레미 I세 소테르(Ptolemy I Soter, 주전 367∼283)는 욥바에 수비병을 주둔시켰다. 그 이후 헬라에 대항했던 마카비(Maccabaeus)라 불리는 제사장 출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욥바의 유대인 200명이 익사 당했다(주전 167년). 마카비는 항구를 불태우고 마침내 욥바를 점령하였다(마카비 1서 10:75, 12:33, 13:11). 바로 이때 처음으로 유대 혹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욥바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마카비 가족과 저항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하스모니안 왕조(The Hasmonean dynasty)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주전 142∼63년). 하스모니안 왕조의 통치자 중 하나인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76년)가 해양활동의 상징인 닻을 그의 화폐에 주조할 수 있었던 것은 욥바를 통해 바다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전 63년 폼페이의 이스라엘 점령은 욥바를 이방인의 손에 다시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었을 때(The Great King Herod, 주전 37년) 그는 욥바를 통해 로마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의 거주지로서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욥바를 로마화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헤롯은 욥바가 아닌 새로운 항구도시를 가이사랴에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주전 30년쯤). 욥바는 유대인들의 작은 항구로 오랜 기간 남아 있었고 1세기 이후 기독교 도시로 성장했다. 비잔틴 시대에 욥바를 방문한 이들은 욥바가 얼마나 발전된 항구도시인가를 말하고 있다.

<항구도시 ‘가이사랴’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