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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람 사람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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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이스라엘과 끝없이 전쟁… 다메섹이 중심도시

가깝고도 먼 이웃


성서 속에 등장하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 중 블레셋 사람들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아람 사람들이다. 노아의 아들 셈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람’이었고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람 족속의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했고(창 25:20), 야곱 역시 아람 사람이었던 외삼촌 라반의 딸들과 결혼했다(창 28:2).

다윗 시대 이후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가 되었으며(삼하 8:5, 삼하 10:18), 북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였던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왕상 22:35). 특히 아람 왕 벤하닷과 하사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고 증언하고 있다(왕상 20:26, 왕하 6:24, 왕하 13:4).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원수지간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과 아람은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은 이집트에서 사온 말들을 아람 왕들에게 되팔기도 했으며(왕상 10:29), 병 치료를 위해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왕하 5장).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람은 앗수르와 바벨론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제국들과 맞서는 강력한 제국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존재했다.

도시 연맹 국가

아람 사람들에 대한 초기 정보는 구약성서 외에는 많이 찾을 수가 없다. 주전 2300년께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에블라 문서에 아라무(a-ra-mu)라고 불린 장소와, 비슷한 시기에 아카드의 왕이었던 나람신이 정복한 장소 중 아라메(a-ra-me)가 있으나 이곳이 아람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아람이 처음 고대 문서에 등장하는 것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I세(주전 1114∼1076년)의 연대기로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아람 사람들은 적어도 주전 1200년께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밝혀졌다. 이들의 주 생업은 유목이었고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반농반목 그리고 상업 등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서는 아람의 여러 도시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삭의 아내였던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었으며(창 25:20), 암몬 자손과 연합하여 다윗과의 전쟁을 준비한 아람 사람들 중에는 소바와 르홉 그리고 마아가 사람들이 있었다(삼하 10:8, 대상 19:6).

이와 같이 아람은 몇몇 도시들의 연맹 국가 형태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도시는 아마도 하맛과 다메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에 등장하는 왕들 중 이스라엘에 가장 위협적인 왕들이었던 벤하닷과 하사엘 역시 다메섹에 거주했었다(왕상 15, 18, 19:15). 안타깝게도 아람 사람들의 땅인 시리아에서는 한동안 고고학의 발달이 더디었고 발굴이 왕성하지 못하여 이러한 도시들의 역사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했다. 더불어 다메섹의 경우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고 있어 과거의 도시를 파헤치기가 어렵다. 현대 다메섹 도시의 주변을 발굴하기는 했지만 아주 적은 부분의 고대 모습이 드러났을 뿐이다. 고대 아람어로 기록된 문헌도 상당히 부족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어려움이 있다. 남아 있는 문헌 중 하맛의 자쿠르 석비가 대표적인 왕의 기록이며 성서 도시는 아니지만 알레포에서는 주전 14세기부터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이스라엘과 역사를 공유하다

아람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무엇보다 성서가 가장 많이 제공하고 있다. 주전 1000년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세력이 가나안 땅에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람 사람들은 이 남쪽 지역에 욕심을 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다윗이 왕국을 건설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 간의 전쟁은 끊임없었다. 다윗과 접전을 벌였던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왔지만 오히려 다윗의 손에 2만2000명이 죽임을 당했고(삼하 8:5) 다윗은 다메섹에 수비대를 두어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삼하 8:6). 그러나 아람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윗에게 저항했다.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은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왕이 되었으며(왕상 11:24) 이후에 다메섹은 아람의 중심도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열왕기하 6∼7장으로 아람왕 벤하닷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네 명의 나병환자의 발걸음으로 인해 아람군사들이 도망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텔 단에서 발견된 하사엘의 석비는 우리에게 아람의 문헌과 이스라엘의 성서(왕하 8:28)가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텔 단 석비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보다 자세하게 연재될 것이다). 더불어 아람의 멸망은 이스라엘에 기인하고 있다.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왕하 16:7)라고 편지를 보냈고 니느웨에서 발견된 디글랏 빌레셀 Ⅲ세의 석비에는 주전 732년 그가 어떻게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파괴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다

그러나 이 공격은 사실 아람에게는 득이 되었는지 모른다. 주전 8세기 이미 앗수르의 문화적, 종교적 영향을 받고 있었던 아람 사람들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고 앗수르 사람들과 혼혈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바벨론이 앗수르를 정복할 때 이미 앗수르화된 아람의 영토는 자연스럽게 바빌론의 땅으로 흡수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람 사람들의 언어는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지방 언어로 사용되면서 결국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 지역을 연결하는 표준어가 되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의 남유다 성읍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위협하고자 랍사게를 보냈을 때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는 랍사게의 아람 방언을 알아듣는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18:26). 또한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릴 때 그들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을 사용했다(스 4:7).

아람어는 처음에 베니게어 즉 가나안어들과 같은 알파벳을 사용했으며 다른 언어들이 사라진 후 정사각형에 유사한 형태의 알파벳으로 발전되었다. 주전 538년, 고대 히브리어 알파벳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당시 살아남아 있던 아람어 알파벳을 사용하였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헬라어가 표준어가 되었지만 아람어는 지방 언어로서 계속 사용되었다. 아람어는 후에 아랍어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아람 사람들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