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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람 사람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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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드神 섬기던 아람 땅에 기독교-유대교 공존

아람의 신전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운 남유다 왕 아하스

주전 732년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공격에 겁을 먹은 남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Ⅲ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결국 앗수르의 손에 아람은 무너지고 말았다(왕하16장). 아하스는 아람을 정복하고 다메섹에 있었던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갔다가 거기 있는 아람의 신전 제단과 동일한 제단을 만들도록 하였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아하스는 ‘새 제단’(왕하 16:14)에서 제사를 지냈고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 옮겨다 놓았다. 아하스는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소제물과 번제물”(15절)을 새 제단에서 드리게 했고 원래의 놋제단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여쭐’ 때만 사용하도록 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신앙적 범죄는 남유다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기억되었고 사후에는 왕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는 모욕적인 형벌로 이어졌다(역대하 28:27).

비를 불러오는 신 하다드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아하스보다 먼저 아람의 신들을 섬긴 기록이 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사사시대 당시, 이스라엘 자손은 다른 가나안 신들과 함께 아람의 신들을 섬겼다(삿 10:6). 아람 왕 하사엘이 세운 석비와 그의 말 눈가리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아람의 신은 하다드라고 불렀다. 하다드의 기원은 앗수르와 바빌론의 아다드 신이며 비를 불러오는 신이다. 그래서 하다드의 형상을 보면 한 손에는 번개, 그리고 다른 손에는 철퇴가 들려져 있다. 황소의 형상을 보여주는 하다드는 가나안뿐만 아니라 앗수르와 바빌론 지역에서도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신상으로 자주 발견된다.

하다드는 구약성서에서 시돈과 두로의 바알처럼 고대 이스라엘에 큰 영향을 미친 아람의 신이었다. 특히 비를 다스리는 신이었기 때문에 하다드와 바알을 동일한 신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테슙으로, 그리스에서는 제우스로, 로마에서는 주피터로 불린 신들과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

고대 근동지역의 기후는 건기의 여름과 우기의 겨울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다. 덥고 건조한 긴 여름이 지나 비가 오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염원은 비를 내리는 신에 중요성을 더했고 결국 하다드는 하늘의 신 바알과 함께 최고의 신으로 등극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비를 다스렸기 때문에 초목을 관리할 수 있었으며 농업과 목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하다드는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우가릿에서 발견된 가나안의 신화에도 고대 근동지역의 기후는 하다드 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인간이 풍요롭게 살게 된 농경을 관장하는 신으로 최고의 신이 된 하다드는 그의 형제 신인 바다의 신 얌(yam)과 싸워 이겼으나 죽음의 신인 못(mot)과의 싸움에서는 죽고 만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온통 메말랐고 결국 그를 되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다드가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고대 근동지역은 여름이며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비가 오는 겨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은 이스라엘 안에도 퍼져나갔고 바알 곧 하다드에게 제사 지냈던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는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어느 신이 비를 내리게 하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바알 곧 하다드 신의 제사장들과 겨루어 이겼다(왕상 18장). 하다드에 대한 신앙은 아람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뿌리 깊게 박힌 것으로, 왕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다윗과 싸웠던 아람 소바의 왕 이름은 ‘하다드는 도움’이라는 뜻의 하닷에셀이며(삼하 8장), 유다 왕 아사(왕상 15장)와 이스라엘 왕 아합(왕상 20장)을 괴롭힌 다메섹의 왕은 ‘하다드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벤하닷이었다.

사라진 아람의 흔적위에 세워진 유대교와 기독교

앗수르와 바빌론의 영토가 된 아람지역에 하다드 신을 주신으로 했던 종교적 관습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전 4세기 이후 헬라 문명과 주전 1세기 이후 로마 문명의 부흥은 아람과 이스라엘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특히 종교적 상황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 왔다. 이젠 아람의 이름이 아닌 수리아의 다메섹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주후 1세기 이후 다메섹에 만 명 이상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많은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을 박해하고자 했던 바울과 그의 회심 사건도 일어났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헬라-로마의 종교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다메섹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다메섹은 아니지만 시리아 영토 내 좀 더 앗수르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라 불리는 유적지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존의 모습이 발견된 바 있다.

두라 유로포스는 헬라-로마시대에 잘 요새화된 도시였지만 주후 3세기 참혹한 전쟁 이후 버려진 땅으로 그 이후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다. 1920년 발굴이 시작되자마자 당시의 버려진 모습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이 유적지는 ‘시리아 사막의 폼페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주전 2세기경부터 헬라 문명의 상업도시가 있었던 두라 유로포스에서는 다양한 종교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주후 2세기 건축된 것으로 보이는 유대교의 회당과 기독교의 교회가 발견되었다. 특별히 이 교회는 현재까지 발견된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로 초대 가정교회의 시작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회당과 교회는 모두 진흙 벽돌로 지은 가정집을 종교 건물로 개조하여 사용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벽면들은 성서 이야기와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로 가득했다. 재미난 것은 이 두 건물이 거리상 매우 가깝다는 것과 건축 구조에 있어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두 건물의 다른 점이 있다면 벽화의 내용이다. 회당의 벽화의 경우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광경,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과 에스더서 등을 표현한 데 반해 교회의 벽화는 예수의 기적이 주요 주제가 되어 있다. 두라 유로포스뿐만 아니라 아람 지역의 많은 도시들에는 유대회당과 교회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9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나게 되고 오히려 다메섹에서부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이 사실에 당혹한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고 결국 다메섹에서 도망 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건은 다메섹을 중심으로 시리아 지역이 보다 기독교화되는 데 불을 지폈으리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기독교는 초대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시리아 정교회라 불리는 교파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